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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문헌으로 비교한 오산장의 명칭과 개시일 131
택리지 동국문헌비고 도로고 임원십육지 화성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수원부지도 생활환경
자료
(1753) (1770) (1770) (1830) (1831) (1851-56) (1863년경) (1872)
장시명 鰲山場 鰲山場 鰲山場 烏山場 烏梅場 烏梅場 烏山場 烏山場 / 지명유래
개시일 3·8 3·8 3·8 1·6 - 3·8 3·8 -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구읍치 시기 수원도호
부에서 읍내장(邑內場), 오산장(鰲山場), 석현장(石峴場), 팔탄장(八呑場), 안중장(安中場), 오타장(五
朶場), 사슬곶장(沙瑟串場) 등 7개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개시일별로 구분해보면 읍내장, 석현장, 안
중장, 오타장이 1·6일, 오산장이 3·8일, 사슬곶장이 4·9일, 팔탄장이 5·10일로 네 곳의 장이 동
일한 날에 개설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 경기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시장권이 형성되
어가고 있었던 추세였으나, 수원도호부의 경우 장시 발달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2. 도로망에 따른 장시의 발달
장시는 사람들이 이동하기 쉬운 곳에서 발달하기에 오산장 역시 조선시대 도로망 구축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의 도로망은 서울-개성, 서울-죽산, 서울-직산, 서울-포천의 4대로였다. 조선 중기 이
후 6대로를 거쳐 19세기 후반에 10대로까지 증가하지만, 이 도로들은 기존의 6대로에서 분기한 것으
로 『도로고』(1770)의 기록에 의하면 6대로 모두 출발점은 서울, 즉 경도(京都)이다.
6대로는 서울과 서북·동북·동·동남·서남·서쪽방향의 극지를 방사선으로 연결한다. 제1로인
‘경성서북저의주로제일’(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은 개성과 평양을 지나 평안도 의주까지, 제2로인 ‘경
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는 누원, 회양, 철령, 함흥을 지나 함경도 경흥 서수라까
지, 제3로인 ‘경성동저평해로제삼’(京城東抵平海路第三)은 양근, 지평, 원주, 강릉을 지나 강원도 평
해까지, 제4로인 ‘경성동남저동래로제사’(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는 용인, 충주, 상주, 대구를 지나 경
상도 동래까지, 제5로인 ‘경성서남저제주로제오’(京城西南抵濟州路第五)는 과천, 수원, 공주, 전주,
해남, 이후 해로로 제주까지, 제6로인 ‘경성서저강화로제육’(京城西抵江華路第六)은 양화진, 양천, 김
포를 지나 강화까지이다. 의주로로부터 강화로까지 시계방향으로 제1로부터 제6로까지의 번호가 붙
었다. 9)
8) 이정일, 「정조시기 읍치 이전(移轉)과 수원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 『수원역사문화연구』 창간호, 2011.
9) http://kyujanggak.snu.ac.kr/geo/contents/con_story_view.jsp?seq=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