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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 많았다고 하여 ‘鰲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일제가 한문표기가 어려워 ‘烏山’으로 바꿔 표
기했다는 설이 있다. 『경기도 지명유래집』에서도 조선 중엽부터 ‘오미장(梧美場)’ 또는 ‘오산(鰲山)’으
로 통용되어 왔으나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오(鰲)자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당시 타지방보다 유난
히 까마귀가 많았으므로 ‘오산(烏山)’으로 바꿔서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는 구술이 있다. 셋째, 화성
시 동탄면에 ‘오미(梧美)’라는 ‘梧山里’가 있는데 이 이름이 ‘烏山’으로 변화됐으며, 烏자는 고대 삼국시
대부터 지명표기자로 흔히 사용된 글자이고 ‘뫼’가 변화되어 ‘미’ 가 되었다고 보고 ‘산’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다. 넷째, 멀리 외딴 섬이 있으므로 ‘외미’, ‘오미’ 또는 ‘오산’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있다. 중세
국어에서 오자는 ‘홀로’ 혹은 ‘외따로’라는 뜻의 고(孤)로 쓰였으며 오는 고의 ‘ㄱ’탈락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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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산장이라는 이름이 문헌상에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오산(烏山)이라는 이름의 문헌상
의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1416년)에 “수원부(水原府) 오
산(烏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 15년(1433년) 4월 22일에도 “대가가 수원부 오산원(烏
山院) 들에 이르니, 부사 조극관(趙克寬)이 와서 뵈었다. 광주 낙생역(樂生驛) 앞들에 이르러 유숙하
였다. 목사 어중연(魚仲淵)·환관 조안효(趙安孝)가 와서 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산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53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1753)인데, 이때의 오산장
은 ‘鰲山場’으로 개시일은 3·8일이다. ‘鰲山場’이라는 명칭은 이후 『동국문헌비고』(1770)와 『도로고』
(1770)에도 등장한다. 1792년(정조 16년)에 발간된 『화성궐리지(華城闕里誌)』의 지도에도 오산장이 등
장하며 1863년(철종 14년)에 발간된 『대동지지』 그리고 1899년 발간된 『수원부읍지』에도 오산장이라
는 명칭은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1830년의 『임원십육지』에는 한자가 바뀌어서 ‘烏山場’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개시일 역시
1·6일로 변경되어 있으며 1831년의 『화성지』에서는 ‘烏梅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烏梅場’이라는 한자
는 『여도비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개시일은 다시 3·8일로 변경되어 나온다. 1863년경의 『대동지
지』에는 다시 ‘烏山場’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1872년의 『수원부지도』에도 ‘烏山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여 봤을 때, 한자의 변화는 보이지만 자라 오자(鰲)를 쓴 ‘오산장(鰲山場)’과 까마귀 오
자(烏)를 쓴 ‘오산장(烏山場)’ 그리고 ‘오매장(烏梅場)’ 모두 동일한 오산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화성지』 산천조에는 오매천(烏梅川)이 부 남쪽 40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기전영지(畿甸營誌)』의 오
산천(烏山川) 역시 부 남쪽 40리에 있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매와 오산은 동일한 지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오산시사 개시일 역시 1753년과 1770년에 3·8일이었다가 1830년에 1·6일로 표기되었다가 다시 1851년 이
후에는 3·8일로 나타난다. 1830년을 사이에 두고 쭉 3·8일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만 1·6일로
변경되었다기보다는 『임원십육지도』의 1·6일이 오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즉 오산장은 쭉 3·8
제
1 일의 5일장의 형태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권
130 7) 세종대학교 박물관·오산시, 『烏山市의 歷史와 文化遺蹟』,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