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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한 조선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역시 최대의 소비·유통시장은 수도인 한양 129
이었고, 수로와 해로 등이 연결되는 한양 인근의 장시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장시는 규모가 커지면서 생활환경
신장(新場)과 구장(舊場), 성내장(城內場)과 성외장(城外場), 상장(上場)과 하장(下場)으로 나뉘어 열리
기도 하였으며, 장시가 활성화됨에 따라 장시들 간에 긴밀한 연계 관계를 맺어 각 지역마다 장시권이 / 지명유래
형성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상설 점포라 할 수 있는 포자(鋪子)가 설치되면서 장시의 상설화를
이끌었고, 점차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
었던 소규모의 정기 장시들이 더욱 긴밀하게 연계되면서 지역 단위로 하나의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장시들 사이에 개시일의 변경이나 이설, 신설 등도 이루어졌다. 대표
적인 장시의 거래물품은 곡식류, 직물류, 소금, 채소, 소 등 매우 다양하였으며 각 지방의 특산물의 경
우 그 상품성으로 인해 먼 지역까지도 운반되어 거래되었다. 장시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물자의 원
활한 유통이었으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점차적으로 물자를 교환하는 생업과 상업의 장이자
여러 가지 정보를 나누고 전달되는 소통의 공간이자 사교·유희·오락을 즐기는 장으로 발전하였다.
제2절 오산장의 역사와 변천
1. 기록으로 본 오산장
오산의 장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수원 장시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오산이 현재의 오
산시가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수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600년대 고구려 매홀군이었던 오산은 757년 신라시대에는 수성군이었으며, 1310년 고려 충선왕 2
년에는 수원군에 속해 있었다. 1899년에는 수원군의 4개면, 문시(文市), 산성(山城), 청호(晴湖), 초
평(楚坪)으로 나뉘어졌다가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가 면단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문시(文市),
산성(山城), 청호(晴湖), 초평(楚坪)의 4개 면을 합치고 산성면과 청호면의 한 글자씩을 따서 성호면
(城湖面)을 만들었다. 이때의 성호면은 1941년 오산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 오산시의 토대가 되
었다. 한편 1915년 1월 29일에 각 면·동리 명칭을 바꾸면서 성호면에 烏山里가 설치되면서 烏山이라
는 지명이 행정리로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각 면·동리 명칭을 변경하기 전 오산리는
청호면의 사동(四洞), 오동(五洞) 지역이었다.
1941년 10월 1일 수원군 오산면으로 개칭하였고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제 161호에 의해 화성군
오산면이 되었다가 1960년 법률 제1175호에 의해 화성군 오산읍으로 승격된다. 이후 1987년 화성군
동탄면 금곡3리가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법률 제 4050호에 의해 오산시(6개 동)로 승격이 된다.
2019년은 오산시 승격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산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게 된 유래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까마귀가 많아서 오산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둘째, 이곳이 서해안과 가까워 옛날에는 배가 닿을 정도였으며 이곳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