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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원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옛 수원 구읍(정조가 1789년 팔달산으로 읍치를 옮기기 전)
                  에서 동쪽으로 청호역은 25리이고 오산원은 15리라 하였기에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오산장의 변화


                    수원은 조선시대 정조 이후 많은 변화를 겪고 성장하게 된 도시이다. 정조의 화성 축조 이전까지
                  수원장은 서울로 모여드는 상인들이 거쳐가는 길에 위치한 장에 불과했으며 그 기능은 미비한 편이

                  었다. 이는 그 당시 조선이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은 억제하는 ‘무본억말(務本抑末)’ 정책을 펼치던 영

                  향을 받아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리학 원리주의의 중농정책의 심화는 결국 조선경제
                  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결국 ‘무본억말(務本抑末)’ 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시장의 발달과 상업의 번창이 곧 도시의 발달과 맞물려 있었기에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상업시범

                  도시로 육성하기를 계획했다. 상업의 기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도시를 설계하였는데 일례로 화성

                  행궁 앞의 십자로는 중국의 전형적인 상업로의 조성방식이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년) 7월 수원 읍치 이전과 함께 1790년 상업부양책의 추진, 1794년 화성 축
                  조 착공 등의 일들을 연이어 진행하였다. 읍치를 옮길 당시에는 구입치 주민들의 이주를 촉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나라에서는 이주한 주민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한편 관아 건립은 물론 다양

                  한 편의시설들을 연이어 짓기 시작했다.
                    구읍치 시기에는 읍내장(邑內場), 오산장(鰲山場), 팔탄장(八呑場), 사슬곶장(沙瑟串場), 오타장(五
                  朶場), 안중장(安中場), 석현장(石峴場) 등 총 7개의 장시가 열렸다. 개시일별로 구분해보면 『동국문

                  헌비고』(1770)와 『도로고』(1770)의 기록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읍내장, 오타

                  장, 안중장 총 3개 장의 개시일이 1·6일이었으며, 석현장은 2·7일, 오산장은 3·8일, 사슬곶장은
                  4·9일, 팔탄장은 5·10일이었다. 한편 『도로고』에서는 읍내장, 오타장, 안중장은 물론 석현장의 개
                  시일이 1·6일로 나와 있다. 이후 『화성지』(1831)와 『여도비지』(1851~56)에는 석현장의 개시일이 1·6

                  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7일은 오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하튼 개시일이 중복되는

                  장시가 많다는 것은 그 당시 수원지역 장시는 하나의 큰 시장권을 형성하지 못했고 각기 필요성에 의
                  해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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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12) 이정일, 「정조시기 읍치 이전(移轉)과 수원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 『수원역사문화연구』 창간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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