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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 중에 오산원에 머물렀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세종이 머물러 간 오산원은 오산시 초평동(草坪洞) 39
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산시 초평동에 위치한 궁기리(宮基里)와 누읍리(樓邑里)의 지명을 근 생활환경
거로 든다.
원(院)은 담을 두른 궁실(宮室)을 의미한다. 세종 이도가 오산원에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이 시기에 / 지명유래
독산성과 청호역이 아닌 오산원이 신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오산원에 이르니 부사가 와서 뵈었다는 기록으로 이 시기에 수원부의 읍치는 화성시 안녕
동의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고읍성에 거주하던 부사가 세종을 찾아와 인
사하였다고 판단된다.
선조 25년(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7년간의 고단한 전쟁을 치렀다. 왜란을 당하여
수원부사(1589년)를 역임하였던 김천일(金千鎰)은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이 북상하여 한양이 함락되
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김천일은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
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 300명을 모아 북
쪽으로 출병하였다. 공주에서 조헌(趙憲)을 만나 호서 지방의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오산)
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가 크게 늘어 의병장 김천일의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김천일은 오산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
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김천일이 승전한 금령
의 위치는 지금의 오산시 은계동 금곡(金谷)이었다.
선조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선조 25년(1592년) 10월 18
일, “적(왜군)은 오산(烏山) 등 세 군데에 진영을 만들고…,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나열되었고…”의 기록이 있다. 또 선조 32년(1599년) 7월에 “그 군사 수만(數
萬)을 세 영(營)으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에 헤쳐 늘어놓고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었다.”라는 기록
이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청회(靑回)는 오산시 대원동 일대의 청호역(靑胡驛), 오산(烏山)의 들판은 오산시
부산동 일대의 역말(驛말)을 가리킨다.
임진왜란의 기록은 신경(申庚)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등장한다. “수만의 군사를 세
진(鎭)으로 나누어 오산역(烏山驛)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는 기록이다.
선조 26년(1593년)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독성산에 진을 치고 왜군의 침략을 분쇄하였다. 도성 한
양에 머물러 있던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연락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
래서 도성 한양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지금의 수원과 오산을 오가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성책을 굳게 지키며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폈다. 때때로 어두운 밤을
타서 타격을 가하자 왜군은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 한양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