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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형성하는 터전을 의미한다. 모수국은 물고을 곧 매홀(買忽), 수주(水州), 수성(水城), 수원(水原)을 35
의미한다. 생활환경
오산시 벌음동에 ‘돌모루’라는 지명이 있다. 모루는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
침으로 쓰는 모난 쇳덩이’이다. 그리고 지명 돌모루는 ‘바위로 둘려 있는 산모퉁이’를 일컫는다. 오산 / 지명유래
천과 황구지천이 모여들고, 십여 개의 고인돌이 전해지고 모루처럼 모난 지곶동의 독산이 그 장소다.
그러므로 모수국의 중심지는 오산시의 독산성이 틀림없다.
5. 삼국시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11년(BC 8년) 7월에 “왕이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을
설치하여 낙랑(樂浪)의 침략을 막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독산책과 구천책은 오산시 지곶동의 독산성(禿山城)과 수원시 고색동의 고색(古塞)을 가
리킨다고 판단한다. 지곶동과 고색동에 토성과 목책을 세워 백제의 영토를 지켰다는 것이다. 지금의
황구지천을 해자(垓字)로 삼아 하남(직산) 위례성(위례산)을 지켰다는 것이다. 수원시 고색동(古塞洞)
에 남은 토성 고색(古塞)과 오산시 지곶동에 건재한 독산성(禿山城)이 그 흔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古爾王) 5년(AD 238년) 2월에 “왕이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
에 도성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기록의 부산은 지금의 오산시 부산동(釜山洞)과 용인시 부산진
(釜山鎭)을 가리킨다고 판단한다.
고이왕이 부산에서 사냥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에 군영(軍營)을 치고 어떤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것
을 의미한다. 적국과 벌이는 전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이 지역을 백제의 영역으로 복속시키기
위한 출정으로 판단된다.
그 목적은 오산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마한 소국을 제압하기 위한 출정으로 보인다. 화성시 남양읍
에 존재하였던 원양국(爰襄國), 화성시 우정면에 존재하였던 상외국(桑外國)을 흡수하기 위한 포석이
다. 화성시 안녕동의 수원고읍성, 향남면의 길성리토성, 정남면의 태봉산성이 3세기 한성백제시대에
축조된 토성인 것에 근거한다.
지난 2014년, 길성리토성에서는 백제 왕족 계급에 해당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에서 금동
관모, 금동신발, 금귀걸이, 환두대도 등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백제 고이왕이 모수국
의 신지(臣智)에게 내린 의장품(儀裝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양국이 위치하였던 화성시 남양읍과
상외국이 위치하였던 화성시 우정읍 일대에서도 장차 백제왕이 내린 의장품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고 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백 명을 거느
리고 항복하여 왔으므로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백제시대 경기 남서부의 중심지는 독산성(禿山城)이었으며, 이곳에 읍치(邑治)를 두었음
을 시사한다. 백제는 토성 안에 읍성을 두고 城으로 이름지어 불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제의 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