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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斗谷) 등의 옛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오산시의 마을 이름은 아무런 의미 없는 45
숫자로 바뀌었다. 생활환경
1914년 4월 1일, 일제는 수원군 산성면(山城面)과 청호면(菁好面)을 수원군 성호면(城好面)으로 통
합하였다. 청호면 갈곶리, 기문동, 당리, 원통리, 부산동, 수덕동, 천변동 등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리 / 지명유래
(里)·동(洞)명을 청호면 1·2·3·4·5동으로 바꿔버리는 우(愚)를 범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원
리(園里)를 원1·2·3·4·5·6·7리로, 오산리를 오산1·2·3·4·5·6·7·8·9리로, 내삼미(內
三美)를 내삼미1·2리로, 수청리(水淸里)를 수청1·2·3리로, 청학리(靑鶴里)를 청학1·2리로, 궐리
(闕里)를 궐1·2·3·4리로 개명하여 마을이름의 전통을 단절시켰다.
일제의 잔재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산시가 시로 승격되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지명은 고장의 상징이면서 주민의 자존심이다. 수원(水原)은 자연환경의 상징이고, 오산(烏山)은
천손(天孫)의 땅이라는 자존심이 담긴 이름이다.
1) 독산(禿山)
백제 온조왕(溫祚王) 11년(BC 8년)의 기록으로 등장하는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은 말 그
대로 ‘독뫼울’과 ‘개천울’이었다. 목책(木柵)과 토성(土城)으로 두른 울타리였다. 무려 2,027년 전의 지
명이 옛 이름 그대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독산(독뫼)은 백제시대부터 곶창(串倉)의 역할을 하던 산성이었다. 그 흔적은 오산시 지곶동(紙串
洞)과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社倉里)에 또렷하게 남았다. 온조왕이 세운 독산성과 구천책은 백제의
사창과 영토방위의 역할에 충실하였다는 것이다.
독산성 내에는 삼국시대의 사찰 보적사가 위치한다. 백제의 사찰로 전해지는 보적사의 건립 연대
는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백제 침류왕 2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침류왕 2년은 호승 마라난타
의 교화를 받은 왕이 한산에 불사를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둔 해였다.
2) 구천(狗川)
구천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천(狗川)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正祖) 연간에
황구지천(皇口之川, 黃狗之川)으로 바뀌어 불렸다. 정조 이산이 아버지 사도세자 이훤의 묘를 화산에
천장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효성의 군주 정조는 수원의 지지대 고개에 이르러 어가(御駕)에서 내렸다. 아버지의 유택(幽宅)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감히 가마를 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어가에서 내린 왕은 말을 타고 화산으로
향하였다. 일명 ‘정조대왕화산릉행차(正祖大王花山陵行次)’였다.
왕의 행렬이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에 이르면 왕의 행렬은 구천(狗川)을 건너야 했다. 이에 관청에
서는 구천에 돌다리를 놓았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정조로의 대황교(大皇橋)가 그것이었다.
이때부터 구천의 이름은 황구지천(皇口之川)으로 바뀌어 불렸다. 황제의 행렬이 지나간 개천이라
는 의미의 지명이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구천을 황구지천(黃狗之川)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옛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