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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안재홍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최익한, 이영 중심의 장안파와 박헌영 중심의 재건
                  파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연합체였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세력 간의 암투

                  가 발생하면서 우파들이 떨어져 나가고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미군이 도착하기 전인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미군정을 선포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실질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부정되었고 그해 12월 미군정은 인공 명의의 모든 활동을 불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미군

                  정이 내린 모든 결정들은 이후 남한의 기본적 정치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정책은 해방된
                  조선 인민들의 삶이나 이후 한국의 장기적인 발전을 목표로 설계되었다기보다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

                  해를 반영하여 좌익을 배제하고 우익을 지원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점령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
                  없이 시작된 미군정은 국가관료, 사법부, 경찰 및 군대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한국민주당(한민당) 세

                  력이나 일제관료를 충원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과 좌익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활용하고자 했다. 특
                  히 한민당은 임정만이 정통성을 지닌 정부라고 주장하는 보수세력에 의해서 미군 도착 직후에 창당

                  된 정당으로서 친일경력을 지닌 지주·관료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높아
                  지자 이를 완화시킬 정치지도자로서 미군정이 선택한 이승만은 한민당과 정치적 보조를 같이하면서

                  반좌파적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이어 귀국한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박헌영 등 공산
                  주의자들과 한민당세력을 동시에 배격하면서 민족주의적 노선에 의거하여 미소양군 철수, 임정 법통

                  인정을 주장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해방 초기의 정치지형을 재편하는 중대한 정치적 계기로 작동

                  하였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모스크바협정은 조선에 임시정부의 수립, 이를 논의할 미소공동위원회
                  의 설치, 최대 5년의 4개국 신탁통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대는 좌우

                  익을 망라하여 전 국민적 공감을 얻었으나 소련과 북한의 영향을 받은 좌파들은 분단 상황을 먼저 해
                  결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당초 미군정청은 소련이 포함된 다국적 신탁통치보다는 미국 일국에 의한 후견제를 선호하였고 이
                  를 실현하기 위해 송진우의 협조를 받고자 했으나 그가 암살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반대세력은 우파 내에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김구 등 임정세력은 미소의 철수와 임정에 의한 즉
                  각적인 독립을 위하여 반탁입장을 주장하였던 반면, 한민당과 이승만은 반소반공운동과 연계되어 있

                  었다. 결과적으로 반탁운동은 친일경력으로 인해 숨죽이고 있던 한민당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
                  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우익세력은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으로 좌익세력은

      오산시사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통합되면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국내 정치세력의 분열은 그 자체만으
                  로도 파괴적이었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협의대상이 될 한국의 정치집단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장애요인이었다. 조선공산당계와 한민당계가 빠진 상태에서 중도인사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
      제

      3           가 구성되어 합작7원칙 등을 만들어냈지만 좌우의 반대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국내 정
      권
                  치가 이렇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써 통일의 희망은 사라지고 미소간의 갈라먹기식 분단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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