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오산시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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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포구와 해상교통
옛 오산지역은 오늘날과 비교하여 지형이 현격히 틀렸던 것 같다. 현재 오산의 토
지에 사람이 터 잡고 사는 곳에 오래전 옛날에는 배가 서해안으로부터 들어와 물자
도 수송하고 사람도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지형
변화를 추측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보면 밀머리 같은 곳이다.
오산의 해상교통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구전을 근거로 해서 이웃 지자체의 문헌을 통하고 유추해서 알아보고자 한
다.
조선시대 오산은 옛수원(구읍치 : 1789년-정조13년 이전의 수원으로 수원부의 치
소가 현재의 융릉 부근인 화산에 있었다.)의 중심지역으로, 기록으로 보는 옛수원의
지명 이야기는 오산의 이야기로 보아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분석해 보면, 오산지역의 해안선은 오늘날과 달리 내륙 깊숙이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산(옛수원) 근처는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발안의 경우
에는 팔탄면 지월리, 팔탈면 유암리, 남양의 경우에는 마도면 쌍송리 하라문, 조암
의 경우에는 우정면 마산3리 각골, 장안면 사랑리 진계골, 평택시 청북면의 경우에
는 옹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렇게 내륙 깊숙이 들어온 해안선을 따라 나루와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시장이 포구를 중심으로 서는가 하면 토기, 자기 요지의 발달, 창고의 형성, 취락의
발달이 있었다.
또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해안선을 통하여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고자 이에 대한
방어체제도 형성되어 있었는데, 항곶포(亢串浦)의 서쪽에 위치한 양감면, 남면지역
의 방어를 위해서는 사창리성, 소근산성, 길성리토성. 해창포(海倉浦)와 금천포(金川
浦)의 주위에는 팔탄지역 방어를 위해서 오두산성. 옹포(甕浦) 방어를 위해서는 무
성산성. 남양 개죽포(竹浦) 방어를 위해서는 청명산성, 남양영종포성, 성목쟁이성,
사강삼존리토성이 쌓아졌다. 또한 백제시대 초축되었으리라 추측되는 길성리토성,
청명산성, 소근산성 등이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지점과 가까운 거리에 축성되었으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까지 수원의 속현이었던 재양, 광덕, 용성, 쌍부현도 내륙
깊숙이 들어온 포구들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하였다.
재양현(載陽縣)의 입구포구로서는 금천포, 광덕현(廣德縣)의 입구포구로서는 신흥
포. 용성현(龍城縣)의 입구포구로서는 옹포, 쌍부현(雙阜縣)의 입구포구로서는 장안
면 노진리에 있었던 진목포와 우정면 마산3리 각골 일대 혹은 장안면 덕다리 구래
부근에 있었으리라 보이는 구이포와 적진포가 있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현재의 지형과 많이 틀려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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