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오산시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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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황구지천 안녕리 방면 고수부지 하부에서 교대지가 확인되었으며, 황구지천
바닥에서 교량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석재들은 현재 한신대학교
교정으로 이전되었다. 더불어 바닥에 다리의 지반 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잡석을 여러 겹
다져 넣은 시설과 함께 나무기둥을 박아 고정시킨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세람교의 바닥
기초시설로 추정된다. 교량 북편의 교대지는 하천의 고수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장대석 6매가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발굴조사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고지도에 기록된 세람교의 실체를 확인하고, 세람교
(해동지도-세람교)의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여 교통로 연구의 기초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
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6대로(大路), 또는 10대 간선도로 중에 서울에서 호서와 호남으로 향하는 도
로는 수원을 거쳐간다. 서울에서 서남쪽으로 나 있는 6대로의 하나인 제5대로 제주로는
신경준의 「도로고」에 의하면 한성에서 출발하면 동작진을 건너 과천에 이르고 사근천을
건너 수원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진위-소사점-아주교-성환역-직산-천안-차령-공주-니성
-여산-삼례역-태인-정읍-장성-영암-해남-제주에까지 이른다. 여기서 나오는 수원은 수
원화성이 아닌 그 전의 구읍(舊邑, 구읍치)을 말한다. 구읍치 남쪽 아래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이 있기 때문에 황구지천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세람교는 대로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군
사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해온 다리이다.
또한,『일성록』과『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현륭원 행차 시 과천에서 출발하여
수원 행궁을 지나 세람교를 거쳐 현륭원에 당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채제공
의 『번암선생집』58권을 보면 「화산용주사상량문」이 실렸다. 그 중 세람교와 관련된 대목이
있는데, 다리 부근에 6장(18m) 키의 금인상이 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금인(金人)은 대게 옹
중석과 같은 읍성 풍수물로서 수원 구읍성의 풍수물이었으나 이 때는 왕실사찰인 용주사를
나쁜 액으로부터 지키는 기능으로 바뀐 것이다.
화성 축조 전까지 세람교는 육로로 올라온 남쪽의 물산이 수원 구읍에 다다르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며, 이 세람교를 건넌 물자들은 서북쪽으로 현 화성시 봉담면 동화리에 있던
동화역을 지나 매송면 어천리를 거쳐 노량진을 향해 올라갔다는 점에서 세람교는 행정교
통로 뿐만 아니라 물자 유통로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세람교가 있는 세교동은 옛날 ‘잔다리’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세교(細橋)’
이다. 이 명칭으로 보아 황구지천을 건너기 위해 나무다리나 섶다리 등이 많았을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러나 봉학교, 세람교는 돌로 만든 반영구적인 석교였다.
세람교의 한자표기는 ‘細藍橋’나 ‘洗藍橋’도 있다. 영조 때 작성된 『해동지도(海東地圖)』중
「수원부지도」에 나오는 세남교(洗南橋)가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藍이라는 한자는 이 석교와
아무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洗南橋가 타당하다 하면 세람교는 원래 세교의 남쪽에 있는 다
리라는 뜻에 타당성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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