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3 - 제2권
P. 103
였던 조창(漕倉)이었다. 특히 곡창지대인 서해안 일대의 조운선이 많은 습격을 당하였다. 조운선을 103
발견하지 못하여 해상에서 약탈이 어려운 때에는 해안의 조창을 습격하였으며, 전국의 조세가 모두 역사
집결되는 개경 앞까지 출몰하기도 하였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연해의 조창을 내지로 옮기자 왜구 / 유적
의 침입도 점차 내륙 깊숙이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곡 다음으로 왜구의 약탈 대상은 사람이었다. 그
들은 침입 초기부터 사람을 포로로 약탈했는데, 많은 때는 강화에 침입하여 1천여 명을 잡아가기까지 · 유물
하였다. 물론 왜구가 경제적 약탈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구가 침입하면 조운선과 조창이나 민가를
불사르고 부녀를 포로로 해서 밤에는 주색을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두어 살짜리 어린애들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물로 바치는 잔인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왜구의
출몰로 해안 지역이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수원지방에 왜구가 침입한 시기는 1351년(충정왕 3)부터이다. 이때에 왜구들은 약 130척의 선박을
거느리고 자연(紫燕)·삼목(三木 : 인천시)으로부터 침입하여 민가를 방화하여 완전히 불태웠고, 계
43)
속하여 남양(南陽)과 쌍부현(雙阜縣 : 화성시)까지 이르렀다. 이후 1391년(공양왕 3)까지 40년간에
걸쳐 수원지역에 침입한 왜구에 관한 기사는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약 12회가 나타난다.
수원지역에 왜구 침입이 가장 극심하였던 시기는 1377년(우왕 3)부터 1384년(우왕 10)까지 7년간에
6회나 되었고, 우왕 4년에는 3회나 침입을 당하였다. 1360년(공민왕 9)에 수원·용성 등에 왜구가 침
44)
범하였을 때는 마을 청년을 징발하여 군인으로 보충시키고, 백관들도 모두 전쟁에 조력하였으며,
1377년(우왕 3)의 왜구 침입 때는 왜구들이 강화로부터 양광도 바닷가 고을을 모두 점령하고, 우리
전함 50여 척을 빼앗아 그 배를 이용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왜구를 우리 군사로 믿
고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상자가 더욱 많았다. 이때 왜구들은 수원, 경양(慶陽 : 직산), 양성, 안성까지
이르러 이 일대가 쓸쓸하여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고 할 만큼 왜구에 의한 피해가 심하였다. 이때 수
원부사 박승직(朴承直)은 왜구 침입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출동하여 적을 쫓아 안성까지 왔으나, 오
히려 왜구들의 간계에 속아 포위를 당하였다. 박승직은 단기(單騎)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몸만 빠져
45)
나와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많은 군사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같은 엄청난 피해
를 당한 후 조정에서는 개경의 안전이 위협받으므로 철원(鐵原)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논의하기도 했
46)
다. 또한 같은 해에 왜적 1백여 기가 남양·안성·종덕을 침범하고, 또 강화를 침범하여 부사 김인
47)
귀(金仁貴)가 살해되고, 군사 1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수원부를 침
48)
범하였다.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나세(羅世)가 전함 50척으로 왜구를 쳐서 물리쳐 수원을 보호하
였다.
1378년(우왕 4)에는 왜적이 남양과 수원부를 불지르고 노략질하였다. 부사 신인도(愼仁道)는 겨우
43) 『高麗史』 권37, 충정왕 3년 8월 병술 己丑.
44) 『高麗史』 권39, 공민왕 9년 5월 己酉.
45) 『高麗史』 권126, 列傳39 姦臣 王安德傳 .
46) 『高麗史節要』 권30, 禑王 3년 5월 및 『高麗史』 권113 列傳26 諸臣 崔瑩傳.
47) 『高麗史』 권114, 列傳27 諸臣 羅世 .
48) 『高麗史』 권133, 列傳46 우왕 3년 5월 庚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