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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잔(衰殘)한 고을로, 대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폐단이 많은 지역이었다. 19) 99
따라서 진위현의 이장대(李將大)·이당필(李唐必)의 난은 바로 가혹한 수탈로 인한 농민 생활의 피 역사
폐를 원인으로 폭발하고 지방 유지에 이끌려 일어난 대규모 항쟁이었다. 이 민란은 진위현에서 시작 / 유적
되어 광주·수주에 이르기까지 현재 경기도 남부 지역 일대에 충격을 주었다. 또한 광주와 수주의 군
사를 동원하였어도 이들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한 · 유물
편, 최충헌 집권기 이후 전국적인 민란은 진정되었지만, 각지에서 초적(草賊)이라 불리는 농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농민항쟁은 군현체제의 모순, 그로 인한 과중한 수취는 결국 지배질서를
구축한 왕조정부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끝내는 왕조정부를 부정하는 신국가 건설운동으로 발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부곡과 속현지역이 먼저 해체·소멸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은 1219년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함께 섬멸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
두 나라는 형제맹약을 맺었고,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에서 요구한 공물을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공물
의 과중한 부담과 몽골 사신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양국 관계가 긴장되었고, 결국 몽골 사신
이 돌아가는 길에 피살되는 ‘저고여(著古與) 사건’이 일어나 국교가 단절되었다. 이후 1231년부터 몽
골의 침략이 시작되어 1259년(고종 46)까지 전쟁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동안 몽골은 6차례에 걸쳐 고
려를 침입해 왔다. 이때 최우는 개경의 주민 약 10만을 강화도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전국 각지의 백
성들도 해도나 산성으로 입보시켜 입해청야(入海淸野)의 전술로 몽골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몽골은
이에 자극 받아 출륙친조(出陸親朝)를 요구하며 계속 침공하여, 전쟁은 장기화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비참해 졌다. 최씨정권은 이와 무관하게 최우·최항·최의로 정권을 계승하면서 몽골에 끝까지 저항
하며 가혹한 징세로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몽골의 제1차 침공은 고려와 몽골 양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살리타이[撒禮塔]가 민정감찰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후 요동성으로 철수함으로써 1232년 끝이 났다. 그러나 살리타이가 요
동으로 철수한 후에도 그는 거란 출신의 무장 도단(都旦)에게 고려국사도통(高麗國事都統)의 임무를
맡겨 내정을 간섭하고, 몽골의 관인들은 무례한 행동으로 고려인의 반몽의식을 자극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무리한 공물 요구로 고려를 더욱 분개시켰다.
몽골이 요구한 공물은 경제적인데 그치지 않고 정복사업에 필요한 조정군(助征軍) 파견과 왕족 및
대관의 동남(童男)·동녀(童女) 각 500명 그리고 공장(工匠)·자수부인(刺繡婦人) 징발도 포함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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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러한 요구는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다루가치의 고려 내정간섭은 집권자
최우(崔瑀)의 권력 유지에 위기감을 주었다.
최우는 1232년(고종 19)에 몽골과 단교하고 강화도(江華島)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고려가 최우를
중심으로 강경한 항몽정책을 취하자 몽골의 태종은 살리타이에게 고려 침공을 명하였다. 살리타이는
서북면 방면에서 침입한 후 강화도에 사자를 보내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것을 힐난하고 개경으로의
출륙환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러한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로써 살리타이는 강도
19) 『世宗實錄』 권24, 세종 6년 4월 丙寅.
20) 『高麗史』 권23, 고종 1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