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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商民의 物貨를 搶奪얏더라”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1900년 음력 9월 3일 장날인 오산장에 화적
                  (火賊) 수십 명이 들이닥쳐 상인들의 물건을 빼앗아갔다는 내용이다.

                    1907년 11월 28일 총기를 휴대한 의병 5병이 문시면 옛 서문 주막 박인교(朴仁交) 집에 들어와 금
                  10원, 은비녀, 은가락지를 빼앗아 가고, 다시 같은 동네 김윤도(金允道) 집에서도 전 10원, 은비녀, 은

                                                       8)
                  가락지를 빼앗아 남양방면으로 퇴거하였다.  며칠 뒤인 1907년 12월 4일 의병 27명이 문시면 3동 감
                  역, 나감역 2명을 잡아갔는데 문시면 방향산 북쪽에 시체를 묻고 갔다. 이 산 감독 이담(李淡)이 그

                                                                    9)
                  시체를 파서 수원군 남곡면 5동으로 운반하여 매장하였다.  당시 의병들이 소수화되어 약탈적 도적
                  으로 변화는 상황을 당시 신문들은 초점을 맞춰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1909년 12월 7일 충북, 평택,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안경춘(安春敬)이 수원군 문시면 병점역 남방 약 18정 떨어진 산복의
                                                          10)
                  은신처에서 박춘보(朴春甫)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로써 의병에 대한 신문기사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림 3. 수원부 감미면 송산리 양기준梁基俊) 금2원 국채보상 영수증(1907. 4. 2) - 수원박물관 소장



                    한편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된 것이 1907년 2월이었다.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과 모금활

                  동은 3월부터 시작되었는바, 여타 지역에 비해 빠른 대응이었다. 이는 관공서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오산시사        대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경기관찰사 서리 김한목(金漢睦)과 관찰부 주사 나기정(羅基貞)이

                  국채보상금 모집 사무소를 설립한 후 경기도 관내 군수들에게 적극적인 동참을 훈령하였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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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7) ‘鼇山盜警’, 『황성신문』 1900. 10. 1.
                  8) ‘地方消息’, 『대한매일신보』 1907. 12. 10.
                  9) ‘地方消息一通’ 『황성신문』 1907. 12. 10.
    180           10) 隆熙 4年 『暴徒에 關한 編柵』, 各道로 區分하기 어려운 分 警務局Ⅰ, 191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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