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전시가이드 2021년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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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情아리랑




            을 만드시며 콧노래를 부르곤 하셨는데 아리랑의 한소절이었다. 멀리서 온 외       지역 아리랑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아리랑을 시각적 창작에 본격적으로 표현
            손자를 보니 기분이 좋으신 표정이었다. 그 후 대학 2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     하며 확대하였고, 아리랑을 그 지역 삶의 모습으로 담으려 노력했다. 당시 작
            하여 강원도 양구 최전방에 근무하면서 아리랑 솔치고개를 넘나들었다. 매년        가의 행적을 감지한 정선군 최문규 문화원장이 작가의 아리랑을 격려 해 준
            봄 부대근처엔 군사지역 허락받고 들어온 농민들이 부르는 희미한 아리랑을         초창기 일화로 강원도 정선군 내 중・고교 학생들에게 방학 교양특강을 의뢰
            듣는게 유일한 노래였고, 마음의 위로였다.                         하였으며 그 일을 계기로 전국의 아리랑을 찾아 본격적인 연구와 작업에 몰
                                                            두하기 시작했다.
            대학졸업 후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커지면서 군대생활 때 익숙했던 강
            원도를 자주찾아 스케치를 하였으며, 나중에는 전국 명소지역이나 언덕의 소        아리랑은 지역의 상징이면서, 우리 정서의 노래이며, 한국인의 상징이다. 그건
            나무 스케치로 넓혀갔다. 그러는 동안 정선아리랑, 문경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우리 국민 정서를 담은 김치맛처럼 한민족의 노래인 것이다. 땅은 팔도 강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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