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전시가이드 2023년 9월 이달의 작가 이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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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풍경2-88, 162.2X130.3cm, 한지에 옻칠 금분, 2023     무위의 풍경2-89, 162.2X130.3cm, 한지에 옻칠 금분, 2023





       태의 현상적 개별자들[ego]와 원(○) 형태의 궁극적 존재[the Self]의 관  전면점화가 주로 단색의 추상화 경향이 강하고 캔버스를 우주를 의미하
       계를 형상화했다면, <떨림과 울림> 연작들은 유한의 형상과 관념을 비         는 점면으로 채운 것과는 달리, 이형곤은 다양한 형상과 색채의 동그라미
       우고 무한의 법열(法悅)로 깨어 있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의식을 드러        와 네모를 각각 우주의 연기적 법계를 뜻하는 생명의 근원적 존재와 현상
       내었으며, <무위의 풍경>과 <무위의 풍경2> 연작들에서는 현상세계의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로 나타내면서 양자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낸
       개별적 존재자들이 지닌 유한한 형상을 초월하여 대상을 여의는 무상(無         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또한 그러한 법계의 자현을 수직과 수평을 교
       相)과 주체가 사라지는 무아(無我)가 있는 그대로 존재와 의식의 본래진        직하여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도 개성적이다. 기존 연작에서는 초월적 시
       면목을 향유하는 무위(無爲)의 풍경(風景)이 펼쳐진다. 대상과 주체의 분       선에서 내려다 볼 때 동그란 원을 품고 있는 네모난 격자들이 연이어서
       리 작용이 멈추면서 나와 남,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된 자타불이(自他不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생명의 인드라망 혹은 화엄법계의 매트릭스를 구
       二)는 자연스레 현상적 개별자의 유한한 환상을 넘어서서 궁극적 보편자         성하고 있으며, 내재적 시선으로 살펴 볼 때 격자들이 세로로 길게 줄지
       의 무한한 실재로 나타난다. 거기에서 영성예술의 신비의 합일과 온전한         어 선 모양이 드러나고 있다.
       소통이 구현된다.
                                                      그런데 <무위의풍경2>에서는 수평적으로 펼쳐졌던 네모의 격자가 검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無爲)의 예술        은 색, 빨간 색, 황금 색으로 수렴 혹은 확산되는 중첩의 양상으로 형상화
       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기억>, <공간의 상>, <울림과 떨림>    되기도 하고, 형태와 색채를 달리 하여 일(一)과 합쳐져서 수직적으로 일
       연작들에서 다(多)에서 일(一) 혹은 유(有)에서 무(無)로, 현상 세계의 개    (一)자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궁극적 보편자의 동그라미와
       별적 존재자들로부터 보편적인 궁극적 존재로 거슬러 올라가는 깨달음           현상적 개별자의 네모가 한 데 합쳐져서 비정형적 형상으로 가로나 세로
       의 삼매(三昧)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생명 에너지의 발산이 압도적인 반         의 방식 혹은 수평과 수직의 방식이 교차 대조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면, <무위의 풍경> 연작들에서는 근원적 하나[一]를 현상적 생명의 근원       한다. 동그라미와 네모로 형상화되던 궁극적 보편자와 현상적 개별자의
       인 히란야가르바의 알이나 일(一)을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은 자연스         경계가 사라지면서 자유로운 형태와 다양한 색체가 중첩되거나 혼합되
       러운 형상으로 드러내었는데, <무위의 풍경2>에서는 격자나 원은 물론         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동그라미나 네모 대신 산처럼
       알이나 일마저도 더욱 간결하면서도 비정형화된 자유로운 형상으로 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세모 형상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고, 현상적 개
       주하고 있다.                                        별자를 뜻하는 형상이 네모 대신 그릇 모양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럼
       <무위의 풍경2>에서는 궁극적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하며 애쓰는 의          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변용되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 비정형적 형상
       도적 움직임이 더 이상 없어져서 뚜렷했던 형상이 자연스러운 여러 가지         들은 언제나 알파의 빨간색이나 오메가의 검은색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
       변주를 통해 나타나니,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풍경이다. 실        에 자리잡은 황금색의 적적성성한 깨달음의 빛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현
       제로 먼저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을 구분하던 중중무진의 격자들          상적 개별자들의 다양한 형상과 색채는 실은 근원적 보편자의 자연스러
       을 구분하고 상호 연결하던 정형적 틀이 자유롭게 변용되고 있다. 이런         운 발현인 자현일 뿐이다.
       형상화 양식은 김환기의 전면점화에서 먼저 확인된다. 그러나 김환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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