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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해도 기운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자신을 찾아온 그림 그리는 언니 우슬라의 오두막으로 기분 전환하러 간다. 그곳에서 아주 멋있는 그림을 보고 키키는 넋을 잃는다. 그런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나’(키키)라고 한다. 감정에 꺾이고 쉽게 실망하는 나의 모습과는 다른 아주 화려 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언니는 저게 나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릴 때 기억하는 어른 스러운 언니들은 당시의 그녀들 나이 곱절을 먹은 지금에도 여전히 언니로 여겨진다. 다른 방식 으로 사는 사람들을 멋있게 우러러 보는 것은 지금은 잘 하지 않는 일이다)
깊은 밤 키키는 고민을 털어 놓고 우슬라는 자신도 그럴 때가 있다고 한다. 좋은 친구라는 증거 중 하나는 내가 힘들게 털어 놓은 고민에 대해서 자신들도 그럴 때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나 답지 않은 행동과 평소 내 능력에 못 미치는 결과들, 여러 가지 시도들이 좌초되는 시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면 한층 마음이 놓인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마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일상을 견뎌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로 고민을 나누며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을 아 는 일. 그렇게 나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도움을 받는 법을 배웠나보다.
성숙하고 멋있는 언니 우슬라와 하루에도 몇 번 씩 기분이 바뀌는 키키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같 은 성우가 분했다고 한다. 마치 나의 두 가지 모습처럼 어쩌면 실망하고 있는 사람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일까. 마음과 생각이 어긋나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헤메고 있는 동안 에도 또 다른 나는 열심히 나의 멋있는 면을 기억하며 그리고 있었다. 물론 잘 그려지지 않아 고 전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땐 그냥 계속 그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 걷힐지 모 르는 불안에 쌓였을 때에도 기다림만 갖는다면 일어날 수 있다.
작년 모퉁이극장에서 동네 친구 두명과 마녀배달부 키키를 본 적이 있다. 그 친구들 역시 중학교 에 막 올라간 1학년 때 부터 친구들이고 키키를 만난 때와 같다. 이 두 친구들도 20년 동안 만날 줄은 몰랐다. 키키가 그러했듯 한때는 자주, 한때는 잊혀졌다가 지금은 동네 통닭집 두루치기가 소울푸드처럼 고파올 때면 편하게 만난다. 지금은 서로의 한계도 알고 기대를 줄여야겠다는 생 각이 든다. 하지만 애석하지 않다. 이것이 지금의 방식임을 안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의 방식을 사는 것이다. 지금 더 많은 친절과 명랑함이 없는 것 은 약간 아쉽지만 어린 시절 나는 충분히 키키만큼 자주 가슴이 벅찼고 또 상처를 받았다. 지금하 지 못하는 일을 그 당시에 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 고 크게 실수도 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그 당시에 하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다. 그러면 지금쯤 바 위섬처럼 고립되었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말이 민망한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힌다. 사람간 거리를 재 며 하루 종일 균형을 가늠한 날이면 혼자된 방에서 순식간에 무너지는 일도 다반사다. 내가 무엇 이 되고 싶다는 기대도 더 자랄 것이라는 상상도 없는데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 날 침대 에 엎어져 키키처럼 읊조려 본다. ‘밝고 솔직한 키키는 어디로 간 걸까’. 그러면 어느새 불 꺼진 방 에서 울먹이며 빗자루를 깎던 키키가 생각나고 또 우슬라가 그린 그림까지도 생각난다. 나 자신 이 맘에 안 들어 힘들어 하는 순간에도 내 주변 사람들 기억 속에는 내 생각보다 나를 좋은 모습 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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