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은혜의 70년, 여호와께 돌아가자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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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으로 민중 속

                                                                                                                                            으로 스며들었으며, 선교사들의 이러한 사역으로 구한말 지식인이 다
                       한국 교회의 출범과 민족 수난
                                                                                                                                            수 배출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계몽주의적인 선교

                                                                                                                                            방향이 한국 교회가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는 개신교가 중심이 되어 일본의 국권 침탈 부당성을 주

                                                                                                                                            장했으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친 3·1독립선언에서도 개신교 신자와
                                                                                                                                            선교사들이 중심 역할을 맡았다. 3·1독립선언은 일제에 순응적이었던

                                                                                                                                            천주교계를 제외한 주요 종교인이 ‘민족’이란 기치 아래 하나가 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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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 이                                                                                       사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개신교인들이 천도교도 및 불교도와 하나가

               르러 통상을 요구하다가 불에 타 침몰한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외국 선                                                                                       되어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뿐 아니라 민족 대표 33인 중에 개
               교사들이 선교를 시도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직접적인                                                                                            신교계는 16인으로 2인의 불교계는 물론 15인의 천도교계보다도 많았

               개신교 선교는 난관에 봉착했다.                                                                                                            다. 당시 개신교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1.1~1.3%로 추측하니 20여만
               한반도 선교가 불가능했지만 만주,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중심으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제1부  |  국제CBMC 출범과 한국CBMC의 해외 사역

               로 전도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새문안교회 장로인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우리나라는 독립을 맞이했지만 남북
               서상륜, 백홍준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분단, 남한 내부의 좌우 갈등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겪게 된다. 개신교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선의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                                                                                         계 역시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관련 논
               터 성서 번역에 착수해 1882년 함경도 방언으로 된 <예수셩교 누가복                                                                                      쟁으로 분열되었으며,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인한 마찰도 있었다.

               음젼셔>를 출판했다. 1883년 이수정이 일본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                                                                                      일제 청산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
        제2부  |  한국CBMC 70년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
               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1883년에                                                                                       했을 때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 우리나라 근
               는 〈마가전〉을 출판해 냈다. 성서를 한글로 옮긴 실천은 일본에서 체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인 한국전쟁으로 남한 군인 13만여 명,
               류하고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준비하는 데                                                                                         민간인 24만여 명이 사망했다. 북한까지 합하면 100만 명이 넘는 사

               도움을 주었다.                                                                                                                     망자가 발생했다.
               1885년 4월 5일 같은 배를 타고 장로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북한 지역의 사역자와 기독교

               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언더                                                                                        인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는 기회였다.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우드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을 설립했고,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                                                                                          부터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사역자와 기독교인은 철저한 반공

               (現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 설립했다. 그 밖에 침례교는 캐나다                                                                                       주의자들이었으며, 전쟁 후 남한 사회의 공산주의 척결에 선봉 역할을
               의 맬컴 펜윅이 전래했으며, 재림교회는 1904년 이응현, 손흥조가 하                                                                                      했다.

               와이로 이민 도중 일본 고베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귀국하
               면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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