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은혜의 70년, 여호와께 돌아가자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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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 CMMC(Christian Military Men’s Committee) 조직과 관계  부산CBMC
 를 맺고 있었으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민의원이자 <기독공보> 부사장으로 활동하던 황성수 박사가 힐 대령

 하나님의 제자답게 모범적인 활동을 펼치는 신앙동지회의 활동을 지  으로부터 처음 CBMC를 소개받았다. 황성수 박사는 CBMC가 보수
 켜본 힐 대령은 이경화 소령을 찾아가 CBMC를 소개했다. 이경화 소  적이고, 초교파적이며, 일반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에 마음

 령은 힐 대령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고, 신앙동지회 회원을 중심으로   이 끌렸다. 부산에서 함께 활동하던 장수철, 이동백, 조인덕, 강경옥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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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CBMC를 조직했다. 이경화 소령이 회장을, 한영빈 중위가 부회장  에게 CBMC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이들이 의기투합해 부산에서

 을 맡았다.                            CBMC 활동을 시작했다. 이 모임은 이후 서울CBMC의 모태가 되었다.
 이경화 회장은 여러 차례 국제CBMC와 서신을 교환하며 경주에서 펼  한편 당시 부산에서 시작한 CBMC의 회원 대부분은 전쟁을 피해 부

 치고 있는 활동 사항을 사진과 함께 보냈다. 이경화 회장이 보낸 경주  산에 임시로 거처를 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산CBMC라는 명
 CBMC의 활동 소식은 국제CBMC에서 발행하는 <Contact>라는 매  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 환도 이후 황성수 박사를 비롯한                  제1장  |  고난의 시기에 찾아온 하나님의 부르심

 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CBMC 회원이 서울로 복귀해 부산의 CBMC 활동은 침체기
 이경화 회장은 전역 후 가정을 돌볼 겨를도 없이 사재까지 사용하면서   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CBMC 사역에 매진했다. 경주CBMC 회관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최진  오랜 공백기를 겪던 부산 지역의 CBMC 활동은 1959년 10월 왈도 예
 제2부  |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
 희 집사를 비롯한 회원들과 함께 산상 기도회, 노방전도, 전도 집회, 의  거 씨의 방한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휴전 이후 남한 사회
 료 봉사에 헌신했다.                       는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으며 서민들은 빈곤과 불안에
                                   시달렸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으로 미래를 가꾸려는 부

                                   산 지역의 기독실업인들이 부산CBMC 조직에 뜻을 모으고 정태성 사
 황성수 회장의 경주지회 방문과 경주지회 나환자촌 의료 봉사  경주지회 이경화 회장은 자신들의 사역 활동 소식을 국제CBMC에서 발행하는   장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함으로써 부산CBMC가 탄생했다.
 <Contact>라는 매체에 소개함으로써 한국에 CBMC가 존재한다는 것을 국제CBMC 회원들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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