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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쟁탈이 시작되었는데 1953년 4월 28일 쌍방은 신(新) 시장은 매 3일, 구(旧)시장은 매 8일에 개시
                  (開市)하는 것으로 합의·타결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상인들의 구시장 집중현상으로 신시장은
                                                                                                                 121
                  시장형성 자체가 무너지게 되었고 우시장(牛市長)만 남게 되어 1988년 12월 오산시 승격 직전에 공매
                                                                                                                  산업
                  되어 남촌동으로 이전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국내경제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고 1970                                        · 경제
                  년대에는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 시기 오산은 여전히 화성군의 한 읍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독자                                           /  보건

                  적인 자료를 확인할 수 없지만, 1964년 말 화성군의 주요 공업 생산실적을 보면, 기와 170만 7,350                                    · 환경위생
                  매, 도자기 2만 3,400개, 연탄 9,000t, 농기구 11만 1,500대 등이었다. 생산량의 대부분은 오산읍(현

                  오산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봉담면과 팔탄면에서 도자기를, 향남면에서 도자기와 농기구를 생산 하
                           22)
                  고 있었다.                                                                                          · 사회복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서울 및 수도권 인구 집중과 도시 과밀화는 각종 사회
                  문제들을 야기하면서 수도권 인구 급증을 막기 위한 공업 분산에 대한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1970년                                           /  사법

                  대 중반 공업의 발달은 화성군이 위치한 경기 남부 지역에서 주를 이루었다. 1960년대는 전반적으로                                         · 치안
                  화성 지역의 인구는 정체되어 있었다. 외부로부터 유입요인은 거의 없었고, 오산읍과 남양면에 주둔

                  하고 있는 미군기지촌의 이동과 합병에 따른 주변 상인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동이 있                                            · 소방
                             23)
                  었을 뿐이다.                                                                                         · 언론
                    수원시가 섬유도시로써 면모를 갖추어 갈 때 화성 지역은 공업도시의 배후로써 생활필수품과 화학
                  공업, 요업, 즉 세탁비누, 시멘트, 벽돌, 기와, 침목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위 표를 살펴보면 매송

                  면, 송산면, 서신면, 장안면, 우정면, 양감면, 정남면, 동탄면은 생산기반 시설이 없었고, 오산읍에서
                  는 기와와 돈모, 반월면에서는 인모와 눈썹가공업, 향남면에서는 기와, 도자기, 농기구를 생산하였

                  다. 1960년대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인 가발제조업, 눈썹가공업과 내수기반인 도자기, 연탄, 기와가
                  주로 생산되었다.      24)

                    오산읍의 경우 1950년대 후반부터 공장이 들어섰는데, 이곳이 서울의 배후도시로 기능하면서 교통
                  이 편리해 공업 원료나 생산자재, 생산 제품의 수송이 용이하여 산업체의 진입이 빨랐기 때문이다.

                  1957년 7월 누읍리의 피어리스 주식회사 창립을 필두로, 1966년 6월 오산리의 계성제지공장, 청학리
                  의 쌍용제지공장, 누읍리의 신호제지공장이 준공되었다. 제지공정의 특성상 용수의 공급이 필수적이

                  다 보니 오산천을 중심으로 공장이 늘어나게 되었다.                25)













                  22)  『화성시사 7』, 15쪽.

                  23)  『화성시사 8』, 35쪽 .
                  24)  『화성시사 8』, 41쪽 .

                  25)  『화성시사 8』, 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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