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하나님이 주신 멍석에서 멋지게 놀아라(최웅섭이야기)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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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군 제대 후, 사이버 신학교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한국에서   퓨터를 만나기가 정말 어려웠다. 구입한 다섯 대의 컴퓨터도 한 상

 ‘사이버 대학’이라는 용어를 내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제는 역사의   점에 비치되어 있던 전량이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바쿠 시내 전체에

 뒤안길로 사라지고만 ‘유니텔’,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에서   다섯 대의 컴퓨터만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전량 구입한 것이
 사이버 신학교를 시작하였으며, ‘C++’, ‘Basic’등의 각종 프로그램을   다. 본격적으로 문을 열기 전 신문과 지하철에서 컴퓨터 학원 홍보

 비롯해 포토샵, 오토캐드, 홈페이지 제작 등 컴퓨터에 대해 두루 잘   전단지를 돌렸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한국 컴퓨터 학원을 연다’

 알고 있었다.          는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학원 개원 예

 이 경험을 통해 자신 있는 분야라고 여겼기 때문에 컴퓨터 학원  배를 드리고 본격적으로 수강생을 모집하였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
 을 열기로 했다. 실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장 급한 것이 서류였다.   다. 개강하자마자 50~60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바쿠에서 처음

 컴퓨터회사를 운영한 증명서나 학원에서 가르친 증명서를 가져 오  으로 외국인이 운영하는 컴퓨터 학원이라는 입소문이 돌았던 덕분

 라니 앞이 캄캄했다. 서울의 아는 분들과 후원교회 등에 부탁도 해  이었다. 개원 첫 달 수입이 3백 달러였다. 당시 3백 달러는 우리나라

 보고 요청도 했지만 허사였다. 거짓으로 서류를 만들어 줄 수 없다  돈 50만 원 정도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주 좋은 아파트 한 달 집
 는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전주 안디옥교회에 부탁했다. 마  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3백 달러짜리 사업이 10년

 침 그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전주에서 컴퓨터 학원을 운영하는데, 증  뒤 3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명서를 발급해주겠다고 했다. 공증 받는 문제가 남았지만, 그것도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라는 그곳 집사님의 말씀에 감동이 밀려왔다.
                    컴퓨터 학원에서 시작된 가정교회
 그렇게 발급 받은 서류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러시아로, 러

 시아에서는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관을 거쳐 이곳 외교부에 도착  컴퓨터 학원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면서, 내가 이 나라로 부름

 했다. 또 다시 한 달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회사 설립 인가 때의 3개  받은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의 주특기인 전도를 시작한 것

 월을 포함해 컴퓨터 학원을 열기까지 총 4개월을 공들인 것이다.   이다. 웃기지만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시 나는 직원들에게 ‘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인허가를 받은 나는 컴퓨터 학원이 들어설 사  나님’ 같은 존재였다. 실업 인구가 많아 직장 잡기가 어려운 상황 속

 무실부터 마련했고, 사무실을 채울 컴퓨터를 구하기 위해 바쿠 시내  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는 것, 그것도 외국인 회사에 취직했다는 것은

 를 돌아다녔다. 컴퓨터가 있을 만한 곳을 다 다녔지만 제대로 된 컴  가문의 영광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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