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일산 그리스도의 교회 60주년사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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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부장으로 책임을 맡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 일을 맡았다. 그 게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셨다고 감사해 하셨다.
런 성장과정을 거치며 어린이주일학교와 학생회, 청년회 예배에서 설
제 김복녀 권사 가정
2 장 교까지 맡아 하시게 됐다.
동 아 현
북
1975년부터는 교회 제직으로 제직회의 구성원이 되어 예배위원과 어릴 때 충청북도 청원군에 있는 송정그리스도의교회에 출
구역교사 등으로 사역했다. 1979년엔 교회 재정부장을 맡아 북아현 석하며 신앙을 키워왔다. 그 뒤 대전을 거쳐 서울로 와서는 조
시 대
동에서 노량진으로 이전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당시 우리 교회 용기 목사가 시무하는 서대문 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됐다.
가 그리스도의교회 재단에 속해 있기에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어 어 그러다가 김 권사는 1970년 초 집 근처에 있는 우리 교회를
려운 상황이었다. 기존의 교회 재산을 처분하는 것을 재단이 승인해 발견하고 그리스도의교회인지라 기쁜 마음에 등록하게 되었다
주지 않아 새로운 건물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고 한다.
이런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자 전 성도들은 합심기도에 들어갔다. 기
도와 함께 정 장로는 재정부장으로서 재단과 긴밀하게 협의를 이어나 “교회는 작지만 성도들이 인정이 많고 친절하고 가족적인 분
갔다. 설득하고 설득하는 어려운 일을 기도와 함께 끝까지 수행하신 위기에 이끌린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교회잖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었다 아요?”
고 한다. 김복녀 권사(맨 왼쪽) 가족 (1983. 8) 김 권사는 그런 마음에 우리 교회로 옮겼지만, 남편인 한천석
정부영 장로-최정자 권사 부부는 노량진 시대부터 우리 교회의 찬 장로는 계속 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에서 장로 임직도 받았
양대원으로 지금까지 봉사하고 계신다. 일산교회를 지을 때는 두 분 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작은 교회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발벗고 나
모두 손수 벽돌을 나르는 등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벽돌 한 장이 서서 도와 주셨다. 1981년 초에 정명진 집사가 교통사고로 급작스러
라도 합판 한 장이라도 당신들의 정성을 우리 일산교회 예배당에 담 운 사고를 당했을 때 직접 나서서 행정적인 면을 처리 해주셔서 장례
아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이런 믿음의 수고는 그렇게 우리 를 잘 치루게 하시기도 했다.
교회 곳곳에 아로새겨졌다. 김 권사가 우리 교회에 등록해서 다닐 때는 임봉수 목사 재임 시절
최 권사는 현재 주일마다 성만찬 팀의 리더로서 거룩하고 은혜로운 이었다. 김 권사는 임 목사의 성경공부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여성회
성만찬 예식을 아름답게 완결지으려 늘상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다. 를 이끌고 있는 서영복 권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더욱 교회에 열심을
두 분은 슬하에 1남1녀를 두었고, 자녀들도 모두 부모님의 뜻을 잘 내고 봉사하게 됐다고 한다.
받들어 교회학교를 거쳐 믿음직한 신앙의 일꾼으로 커나갔다. 지금은 친어머니인 김보배 권사와 자녀들도 교회에 열심을 내어 출석하게
저마다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됐다. 자녀들은 학생회와 청년회 임원으로 쭉 봉사했다. 특히 장녀 한
정 장로는 개인적으로 윤병련 장로와 정명진 집사와 깊은 신앙의 소록 양은 성가대 피아노 반주자로, 장남 한종수 군은 학생회와 청년
교우를 나눌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다고 회고하신다. 회를 거쳐 교회학교 반사로 봉사했다.
“두 분 모두 한창 우리 교회를 키워나가고 계실 때 소천하셔서 이루 김 권사는 최정자 권사와 함께 주일예배의 성만찬 예식을 맡아 오
말할 수 없이 안타깝지요.” 그러면서도 윤 장로님께서 헌금한 일천만 래 봉사하였으며, 여선교회 임원을 맡아 전도와 교회 봉사에 진력하
원의 재정과, 정명진 집사의 열정어린 신앙이 마침내 우리 교회를 크 고 계신다. 예배자로서 새벽기도는 물론 교회의 예배와 집회는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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