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일산 그리스도의 교회 60주년사 E-BOOK
P. 61
첫 교회를 바로 공삼열 집사가 살고 있는 북아현동에 세 의 모습을 “대현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의 푹 파진 곳의 비탈에 있는 하
우자는 것, 꼬방”이라고 표현했다.
제
2 장 둘이 이 교회를 ‘공동목회’ 방식으로 이끌어간다는 것. 이영진 교수와 공삼렬 집사는 ‘1962년 1월28일’ 창립예배를 드리기로
동 아 현
북 교회를 북아현동에 세운다는 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보 작정하고 막바지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예배를 위해 참석할 성도들
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매 을 모으기 위해 두 분은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나갔다.
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좁게 보면 이영진 교수에 비 두 분이 의식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니면 저절로 그리 돼 나
시 대
우리 교회의 첫 예배일지 (1962.1.28) 해 공삼열 집사는 아직 목회를 해나가야 할 교회가 없는 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 창립 초기의 전도 방식에는 매우 두드
상태이기에 선배격인 이 전도자께서 공집사를 여러 모로 배려한 것이 러진 특징 3가지가 나타난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당시 북아현동 지역이
바로 서울에서 가장 절박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말라 하고 있는 첫째,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멀리로 넓혀나간다.
동네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둘째, 어린 자녀로부터 부모로 나아간다.
셋째, ‘심방’을 매우 소중하게 활용했다.
가. 북아현동 지역은 전쟁 직후 이북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 넷째,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하게도) 성도의 ‘소천’에 때때로 참으
든 피난민과 이농민으로 갑자기 인구가 늘어난 대표적인 빈민지역으 로 은혜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
로 돼 가고 있었다는 점
나. 특히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은 고향과 일가 친척, 재산, 토지 등 이런 특징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 교회의 역사를 올올히
을 모두 포기한 채 떠나와 엄청난 피해의식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받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고 있었다는 점
다. 북한 지역에서 정치사회적 자유는 물론 종교의 자유를 억압받 첫째 특징을 보자.
은 경험이 있어 복음의 전파에 더욱 공감하고 호의적일 수 있다는 점 우리 교회는 창립 초기에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일가 친척부터 총동
라. 실제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렵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가운 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아현동 산 1번지를 기점으로 삼은 뒤 동
데 복음과 위로에 대한 갈망은 더더욱 높아지고 있었다는 점 심원을 그리듯 전도의 폭을 넓혀나갔다. 이 점에서 가장 탁월한 능력
을 보이면서 성과를 거두신 분이 바로 공삼열 전도자이시다. 기록을
그러나 교회를 처음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배당으로 쓸 보면 공 전도자는 창립예배에 자신의 형님 가족을 비롯해 친척인 안
공간을 셋집으로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간판을 마련하는 일, 예배 점석 장로를 모신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함께 자신의
당의 필요 물품 하나하나를 챙겨서 갖추는 일 등등... 무엇 하나 쉬운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운 전도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셋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믿음과 기도로 헤쳐 나 집의 집주인 가족부터 주님을 영접하도록 이끌었다.
갔다. 간신히 북성초등학교 후문 가까이에 4평 남짓한 판잣집을 세로 그 결과 우리 교회의 첫 열매성도가 공 전도자의 집주인
얻어서 예배당으로 꾸며나갔다. 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산 부부로 부터 나온다. 가족 가운데 한 식구라도 우리 교회의
1번지’, 북아현동의 굴레방다리에서 이화여대 입구의 대현동으로 넘 성도가 되면 그 전 가족을 교회로 모시도록, ‘가까이에서부
어가는 데 있었다. 우리 교회의 2호 교인인 이춘희 집사는 이 예배당 초창기 여름성경학교 수료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 터 멀리까지’ 인도해 나가는 방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60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