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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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서울 구로 및 영등포 지역에 형성되는 신흥공업벨트로 엄청난 부목회자를 ‘전도자’로 통칭해서 명명했고 1971년 임봉수 전도자 부
노동인력을 출퇴근시키는 산업과 교통의 요지로 더욱 확대 발전하게 임부터는 목사라 칭하였지만 거의 두 가지 명칭을 사용하여 혼동하였
제 되었다. 는데 노량진 시대부터는 확실하게 담임목회자를 ‘목사’로 목사 안수
3 장 이러한 배경에서 1980년 드디어 노량진을 중심으로 한 동작구가 를 받지 않은 부교역자를 ‘전도자’로 부르게 되었다.
노 진 량
관악구에서 분구되어 서울특별시의 17번째 구로 그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교회는 예배 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원칙이
시 대 새로 출범한 동작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있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양을 위해선 악기 사용이 필요하
영동 등 강남지역으로 출근하는 새로운 이동인구까지 가세하면서 서 다는 성도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노량
울의 대표적인 부도심으로 비상한다. 곳곳에 새롭게 도로가 확충되고 진 시대에 들어와서 청년을 중심으로 성가대가 조직되어 주일예배 때
상도터널 등 터널들이 뚫렸다. 이런 격변 속에서 바삐 돌아가야만 하 성경봉독 후 성가대의 특별찬양이 들어가게 되었다.
는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영원과 위로를 갈구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 노량진 시대인 1980년부터 1983년 2월까지는 강순혁 목사가,
도 늘어만 갔다. 이들을 향해 개신교의 여러 교회들과 가톨릭 성당 등 1983년 이후론 최제봉 목사가 담임목회자로 사역하였다.
도 새로운 전도의 깃발을 울리기 시작했다.
가. 노량진 시대의 목회 방향
2. 노량진 시대의 목회
강순혁 목사
1979년 9월에 부임한 제7대 강순혁 목사는 “지경을 넓혀주
옵소서”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10개월 만인 1989년 7월1일 강순혁 목사는 “좁은 예배당 터의 북아현동에서 훨씬 더 넓은 노
에 노량진으로 교회의 터를 이전하게 되었다. ‘교회 성장이 없 량진 교회로의 이전은 교회 부흥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라
으면 예배당 대문에 못 질을 하겠다’라고 교회 성장을 절실히 고 믿으셨다. 강목사는 <우리에게 부흥을 주옵소서>란 기도 제목으
바라던 윤병련 장로의 소천이 결국은 그 뜻을 이루게 된 시발 로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이에 온 성도들이 여기에 합심하여 연인원
점의 역할을 했다. 1,610명에 달하는 성도들과 “202일 동안의 대 철야기도”를 드리는
교회 이전에 따른 성도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대 강순혁 목사 놀랍고도 뜨거운 역사가 일어난다.
형버스를 구입하여 운행했으며 이운호 장로가 손수 운전을
하였다. 48) 강 목사는 기도와 말씀 중심의 삶을 앞장서서 실천하고 성도들을 따
르게 했다. 틈만 나면 강대상 뒤에서 늘 기도하심으로써 성도들을 기
노량진시대의 우리 교회 버스 모습
노량진 이전으로 말미암아 크게 변화된 것으로 두 가지를 도하게 이끌었다. 강 목사는 뜨거운 열정적 기도를 통해 성도들을 기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북아현동 시대 초기 10년 동안엔 담임목회자와 도로 양육했다. 나아가 다른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의교회들과 연합하
여 매달 한 번씩 밤11시부터 새벽까지 금요 철야기도회를 펼치셨다.
48) 교회버스 운행 노선 : 홍은동로타리(09:20, 17:20)→사직동(09:31. 17:31)→서
또한 그리스도의교회 재단인 BCC(성경통신교육원)에서 운영하는
대문(09:34, 17:34)→북아현동(09:40. 17:40)→이대앞(09:47, 17:47)→남가좌동
침례식-주례 강순혁 목사
(09:52. 17:52)→망원동(10:00, 18:00)→교회 성경연구 보통과에 모든 교인을 입학시켰다. 그렇게 성경을 바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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