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이재강 개인전 2025. 12. 17 – 12. 23 갤러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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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강의 회화

          경계를 여는, 그렇게 또 다른 현실을 여는





          사람들은 삶을 연극에 비유하고, 영화에 비유하고, 책(보르헤스의 도서관)에 비유한다.                          수도,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교회 혹은 회당 그러므로 기도하
          일엽편주 그러므로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외로운 배와 같은, 칠흑 같은 우주에 던져                         는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품고 있는 언덕을 중심으로 한쪽에 갈릴리 호수가, 그리고 맞
          진 미아와 같은, 고독한 존재(하이데거의 세계에 던져진 존재)에 비유한다. 그리고 여행                         은 편 다른 한쪽에는 키 큰 나무가 서 있는데, 아마도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종려나무일
          과 여로에 비유한다. 저마다 목적지가 있을 것이지만, 종래에는 결국 자신에 가닿는, 잊                         것이다. 종려나무는 다른 그림에서 일종의 시간 기둥으로 변형되기도 하는데, 반투명한
          힌 자기, 아득한 자기, 억압된 자기, 때로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                       튜브에 흐르는 시간 속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인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 있는
          에 이르는 길에 비유한다. 예술은 이러한 비유와 관련이 깊고, 특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데, 하늘로 올라간 숨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아마도 승천한 선한 영혼들을, 영적 존재들
          자기반성적인 과정 그러므로 길과 관련이 깊다. 영화에서의 로드무비가 그렇고, 문학으                           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그리고 우연한 비정형의 얼룩과도 같은 색감
          로 치자면 성장소설이 그렇다.                                                         과 질감 위로 엷은 한반도 이미지가 보이는데, 작가의 현실 인식과 함께 존재 확인(이를
                                                                                   테면, 네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편재하는 신의 말씀)을 의미할 것
          그리고 이재강의 그림이 그렇다.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 억압된 자기, 때로 자기 자신조                       이다.
          차 모르는 자기 그러므로 원형적 자기(칼 융의 원형적 이미지)에 이르는 먼 길을 떠나고,
          그 길 위에서 추수된 자신의 조각들을 그린다. 삶이 그렇듯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그렇게 그림은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점차 형상이 희미해지고, 다만 신의 아우라로 은근
          그리는 과정에서 형상이 찾아지는, 어쩌면 그 자체 생성회화라고 해도 좋을, 그런, 그림                         하다. 그렇게 형상과 추상의,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
          을 그린다.                                                                   인 세계가, 감각적인 현실과 비감각적인 현실이 경계를 허무는 일종의 혼성회화가 실현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의 와중에 얼핏 어떤 화음(영적인 소리)이 들려오는 것도 같은데,
          작가의 근작은 말년의 마티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를 바탕으로 회화로 발전한, 그러므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부르는, 이를테면 시각이 청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감각이
          로 본격적인 회화를 위한 스케치 같고 에스키스 같은 색종이 구성에서 비롯했다. 그런 만                         예시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영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환기되는 것에서 작가의 관심사가
          큼 색종이 구성으로 나타난 하나의 형태가 다른 다양한 형태의 회화로 변주되는, 일련의                          형상을 얻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리즈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형식적으로 그렇고, 내용적인 면에서 작가는 이스라엘 여
          행에서 받은 인상을 이미지로 옮겨 그렸다. 잠재적인 자기, 영적인 자기와 같은 또 다른                         이런 영성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그림으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동치는 가슴을 풀
          자기를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고 해도 좋다.                                                  어낸, 머릿속 피의 흐름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요동치는 가슴이나 머릿속에 흐르는 피의
                                                                                   흐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을, 내적 파토스의
          그림을 보면, 언덕 아래쪽으로 갈릴리 호수가 보인다. 언덕 위에 서서 두 손 벌려 춤추고                        자기실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우연한 존재와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십자가가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한 형상이 보이는데, 작가 본인일                          생명 있는 존재에 바쳐진 생명 예찬을, 바이털리즘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수도 있겠고, 초월적인 존재의 알 수 없는 몸짓일 수도 있겠다.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일                        한눈에도 추상화의 경향성이 뚜렷한, 보기에 따라선 추상표현주의와 특히 마크 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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