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이재강 개인전 2025. 12. 17 – 12. 23 갤러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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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붓질을 수도 없이 반복 덧칠해 그린 그림들에서 작가는 비록 요동                          어우러져 알 수 없는 형태를 만드는, 비정형의 형태를 만들고 비결정적인 형태를 만드는
            치는 가슴이나 피의 흐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요동치는 가슴이 무색하게 담담한 내적                            그림이 생성회화(지금 막 생성되고 있는 회화, 그러므로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다
            침잠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피의 흐름이 무색한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의 그                            만 과정 중에 우연한 형태가 찾아지는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어느 정도 자동
            림이다. 마치 쓸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마른 마당을 쓰는 스님의 빗질과도 같은, 그렇게                          기술법(반쯤 저절로 그려진)에, 자유연상 기법(하나의 우연한 형태가 다른 우연한 형태
            밑도 끝도 없는 붓질로 자신의 마음을 쓸고 마음속 번민을 쓸어내리는, 그런, 그림이라고                          를 부르는)에, 의식의 흐름 기법(의식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그
            해야 할까. 그렇게 자기 속에 요동치는 가슴을 숨겨놓고 있는 관조적인, 그리고 명상적인                          린)에 착안한 초현실주의에 대한 공감을 반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감각적 현실과
            그림이 정중동으로 나타난 생명의 자기실현을, 존재의 존재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비/초현실이 그 경계를 허무는 제3의 현실을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꼬물이 회화라고 부르는,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서 전형적인 경우라고 해                            그리고 여기에 <빛 속으로> 빠져드는 그림이 있다. 마치 빛이 시작되는 원천을 그려놓고
            도 좋을 일련의 그림들이 있다. 멀리 산 능선이 보이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노란 들녘이                        있는 것도 같은 그림 한가운데에, 그러므로 빛의 중심에 양팔을 벌리고 선 사람 형상 같
            보이는, 그리고 해바라기와 같은 알만한 형상이 보이는 그림이 얼핏 풍경을 연상시키지                            기도 하고, 십자가가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한 형상이 있는 그림이다. 아마도 빛으로 표상
            만(작가는 우크라이나 풍경을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타다 만 초가로                          되는 영적 존재에 대한 감동(환희)을 표현한 것이고, 신적 존재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보이는(아마도 기원을, 기도를 상징할, 아니면 시간을 상징할 수도 있을) 그림이 정물이                          그림일 것이다. 티베트 불교(사자의 서 그러므로 죽음의 책)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있는 풍경을 떠올리게도 되지만, 알만한 형상은 다만 거기까지다.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빛을 향해 가라고 소리 높여 주문을 외운다고 한다. 아마도 한눈

                                                                                      팔지 말고 자신의 원천을 향해 가라는 주문일 것이다.
            이런 알만한 풍경을 배경으로 그 위에 한눈에도 알 수 없는, 암시적인, 반추상적인(아니
            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반구상적인) 형태들이 꼬물거린다. 이를테면 꽈리 같기도 하고, 꽈                          그런가 하면, 기독교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빛은 존재의 처
            리가 터지면서 그 속 알맹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꽃봉오리 같기도 하고, 만개한                          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다. 빛이 회오리처럼 휘돌면서 존재를 빨아들이는 것도 같고, 존재
            꽃잎을 절개한 속 이미지 같기도 한, 아니면 골반을 해부한 생물학적 이미지 같기도 한,                          를 낳는 것도 같은, 온통 빛 천지인, 작가의 그림은 아마도 작가의 평소 영성주의 관념을
            알 수 없는 형태들이 꼬물거린다. 다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 저마다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물질 만능주의에 경도된 현실에 정신적인,
            그 최종적인 형태와 의미가 결정될, 그런, 알 수 없는 이미지, 암시적인 이미지, 그러므로                        영적인 생활철학을 예시해주고 있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열린 이미지, 생성 이미지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성 이미지, 생물학적 이미지, 유기적인 이미지, 우연한 이미지가 초현실주의를 떠
            올리게 하고, 특히 유기체적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몽글몽글한 형태가 하나로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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