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김남표 개인전 2023. 5. 10 – 5. 30 나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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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했고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예술은 정의될 수 없다. 예술은 영원히 끝날 수 없는 역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술을 정의하면 예술은 새로운 모습과 의제를 드러낸다. 예술을 정의하려는 순간 예술은 정의로부터 벗어나는 의제를 제시한다. 예술의 역사를 통해서, 재
현에 관한 논의가 나왔을 때 표현에 관한 그림이 등장했다. 표현에 관한 논의가 완성되었을 때 정서에 관한 그림이 등장했다. 정서에 관한 논의가 나올 때면 어김없
이 형식주의의 그림이 나왔다. 형식에 관한 논의가 무르익기도 전에 제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형식에 관한 논의가 완성될 즈음 다원주의의 주장이 활
발하게 펼쳐졌다. 급기야 예술정의불가능론이 회자되었다.
예술이 현현되는 역사에도 섭리가 있다. 예술 역시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회화는, 반드시 화가가 전대의 화가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
형식을 공인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제도의 산물이다. 그런데 현대회화는 전대 화가와의 대화와 교섭 속에서 공인받아야 한다는 조건마저 상실했다. 더군다
나 미디어와 정보의 범람 속에서 화가들은 혼돈을 겪는다. 조건이 사라진 만큼 자유를 얻었을지언정 어디로 가야할지에 관한 정당한 방향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김남표는 보장된 아카데미의 분위기로부터 거친 현장으로 뛰쳐나온 작가이다. 김남표 회화의 특징은 현장(現場, place)이라는 단어 요약할 수 있다. 현장을 뜻하는
단어는 많다. 가령, ‘site’나 ‘scene’, ‘field’, ‘place’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의미 있는 말은 ‘site’나 ‘scene’, 혹은 ‘field’가 아니라, ‘place’로서의 현장이다. ‘site’는 라
틴어 ‘situs’에서 나왔으며, 이는 단순히 부분적 위치를 뜻한다. ‘scene’은 고대 그리스어 ‘skēnē’에서 나온 말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천을 이어 만든 텐트를 지칭한다.
‘field’는 고대 독일어 ‘feld’에서 나왔으며,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숲의 나무를 베고 경작한 인위적(문화적) 개념이다. 이에 반해 ‘place’는 라틴어 ‘platea’에서 왔으
며 ‘열린 공간’을 뜻한다. 인위의 아무런 개입도 없는 곳이 김남표 작가의 예술무대이다. 무한으로 열린 공간은 허무(nihility)를 극복해주는 힘의 원천이다. 화가는 무
한으로 열린 곳을 화면에 생생하게 살리는 회화만이 전대 역사에 대화를 거는 유일한 길이며, 전대 화가에게 공인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예(禮)라고 생각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모더니즘은 형이상학의 세속화이다. 모더니즘은 알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지각할 수 있고 이성으로 사유할 수 있는 범위만을 다룬다. 이에 반
해 동아시아에는 순야타(sunyata)라는 개념이 있다. 순야타는 ‘devoidness’, ‘emptiness’, ‘hollow’, ‘hollowness’, ‘voidness’ 등으로 번역된다. ‘비어있음’, 혹은 ‘텅 빔’이다.
비어있다는 뜻과 무(無), 혹은 허무와는 천양(天壤)의 차이가 난다. 어머니의 자궁은 비어있다. 그러나 그곳은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마찬가지로 계곡은 비어있
지만 메아리를 사방으로 울리며 만물을 생성한다. 그래서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谷神不死). 2) 순야타는 텅 비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하다. 이를 텅 빈 충만
(empty fullness)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누구나 텅 빈 충만을 누려왔다. 우리는 누구나 유년기에 보았던 달밤을 기억한다. 유년기의 달밤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느낀 충만이었다. 바람에 나부껴 유영하는 숲 그림자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달빛을 흔드는 시냇물 소리에 환희가 밀려왔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있음을 알았다. 세계의 총체적 연결 속에서 걱정과 근심, 미움과 원망은 설자리가 없었다. 달밤의 설렘과 내일 달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
만이 가슴 속에 샘솟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 계산하게 되었다. 텅 빈 충만은 분해되었고 기억의 파편은 뇌리 깊은 곳으
로 흩어졌다.
김남표 작가는 텅 빈 충만을 즉각적으로(instantly) 현시한다. 이것이 회화라는 추상적 인격체에게 작가가 헌사(獻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작가가 융(絨, velvet)의 올을 핀으로 일으켜 달밤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행위는 단순한 재현(묘사)이 아니다.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 모두를 과
거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텅 빈 충만의 시간 속에서의 존재론적 체험이 다시 회복되길 바라는 작가의 ‘대체로서의 몸짓(gesture of re-
placement)’이다. 여기서 대체(re-placement)는 충만했던 장소의 부활을 의미한다. 작가가 그림의 모든 화두에 ‘즉(卽, instant)’이라는 개념을 선사하는 이유이다. 즉
경(卽景, instant landscape), 즉 눈앞에서 보는 풍경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과거의 총체를 만나 즉경(卽境)이 된다. 직면한 경지가 된다. 즉각적으로 체험한
경지가 된다.
김남표 작가의 그림 속에서 해바라기 꽃은 가을에서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무거운 머리를 숙이고 생명을 다하고 있었다. 향일규자(向日葵子)라고 명명
된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기는커녕 아래로 고개를 숙인 채 풀죽어 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죽음을 앞 둔 인간도 외부세계를 바라보기보다 자기가 걸어왔던 삶의
궤적, 즉 땅을 바라보게 된다. 죽음을 앞둔 해바라기는 삶의 무게가 버거운지 쇠잔해보였지만, 사실 쇠잔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이 깃든 엄청난 양의 씨앗을 땅에 뿌
2) 『老子』 6章: “谷神不死. 是謂玄牡. 玄牡之門, 是謂天地之根. 緜緜呵若存, 用之不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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