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이진자 초대전 2022. 9. 28 – 10. 3 갤러리라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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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리의 찬가
글 : 신수경 (미술사가, 충남대 연구교수)
음악과 미술은 마음을 순화시키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 (sand stone), 브론즈까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구상과 추상
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일정한 형상으로 작가의 생각 을 넘나들며 제작한 작품들이 총출동되었다. 모자상과 남녀의
과 감각을 드러내는 미술과 달리 음악은 형태가 없다. 그럼에 사랑을 주제로 인체를 단순화시킨 추상적인 작품에는 아직 스
도 불구하고 많은 미술가들은 소리를 유형의 물질로 재현하고 승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작
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은 미술 품으로 녹여낸 것으로, 거칠고 단단한 돌에 서정적인 제목을
가들의 이상이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이진자는 무형인 부여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었다.
소리를 유형으로 전달하는 데 오랫동안 천착해왔다. 이번 전 첫 개인전을 통해 조각가 이진자의 면모를 드러내던 그 무
시에는 ‘소리’뿐만 아니라 회화의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졌던 렵, 그녀는 다시 변신을 시도했다. 예산문화원 원장을 거쳐,
‘빛’을 조형요소로 도입해 새롭게 선을 보인다. 2006년에는 제5대 예산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 활동
을 시작한 것이다. 2009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경청
우선 《빛과 소리의 찬가》전에 이르기까지 이진자가 걸어온 길 으로 소통하는 세상>에는 의정활동을 하며 느꼈던 평소 생각
을 잠시 살펴보자. 이진자는 대학에 입학한 1977년 1세대 여류 과 소신이 담겼다. 군민의 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소통
조각가인 윤영자(尹英子, 1924~2016)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하겠다는 의지를 넓게 벌어진 벨을 통해 멀리까지 소리가 울
주지하다시피 조각은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미술계 려 퍼지는 수자폰과 사람의 귀로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이진
에서 여류조각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분단 이 자의 ‘소리’에 대한 관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후이다. 1949년 홍익대학교에 미술과가 설치된 후 윤영자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조각 전공자로는 첫 입학생이다. 여성에게 미답의 영역이었던
조각계에서 윤영자는 개척자로 활약하며 1973년 목원대학교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희망가>와 <율(律)>의 소재가 된 악
에 미술교육과가 설립되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조각의 불 기는 이처럼 소통에 대한 작가의 염원에서 시작되었다. <경청
모지였던 대전에 정착해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윤영자가 길 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소통의 불일치가 가져다주는 갈등과
러낸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진자다. 불화를 낮은 자세로 경청할 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직설적
‘2세대 여류조각가’라 할 수 있는 이진자는 스승 윤영자처럼 이고 서술적으로 드러냈다면, 후속 작품인 <소리의 외침>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10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이진자는 교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소리로 전달하듯, 하나의 악기 안에 소
사로 활동하면서 20년 넘게 '한국구상조각회' 회원으로 활동 리가 모이고 다시 퍼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소리의 외
했다. 그녀가 《한국구상조각회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할 침>도 보기에 따라서 사회 참여적인 메시지로 읽을 수 있으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이는 한국인의 모습과 정신을 조각으로 나, 작품은 세상의 희로애락을 전달하는 매체에 대한 새로운
구현하며 전통 석조를 계승ㆍ발전시키는데 앞장서 온 조각가 해석에서 출발했다. <희망가> 역시 ‘소리’를 매개로 하고 있
강관욱(姜寬旭, 1945~ )이다. 이진자는 윤영자와 강관욱에게 다. 그러나 이전 작품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메시지 전달보다
각각 ‘소조’와 ‘조각’을 전수받았다. 이진자가 두 스승 밑에서 는 조형적인 면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악기는 일종의 소도구
조소(彫塑)의 각기 다른 기법을 충실히 연마하며, 기초를 닦을 일 뿐이다. 자연의 형태를 닮았으면서도, 두 형상의 미묘한 대
수 있었던 것은 조각가로서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여 비를 통해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류작가들이 그러하듯 육아와 작품 활동,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직선과 곡선, 견고한 입방체 형태와 비어있는 공간과의 상호
병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미술교사 생활 10년 만에 학교 관계를 탐색하며, 한 계단 한 계단 희망을 품고 올라간다.
를 그만둔 그녀는 ‘여성’작가에게 부여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내려놓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율>은 또 다른 형태로 소리를 표현했다. 작가는 작품 중심부
에 반복되는 선을 통해 소리의 리듬감을 표현했다. 원통형의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2004년, 이진자는 자신의 이름을 오 기단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선들이 음악의 선율처럼 유려하
롯이 내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25년 동안 깎고, 새 다. 마치 오선을 타고 올라가듯, 거대한 소리의 울림통과 맞닿
기고, 정성스럽게 빚은 조각품들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기회였 은 나팔을 통해 소리가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듯하다. 작품 앞
다. 당시 전시장에는 흰 대리석부터 검은 대리석(烏石)과 사암 에서 우리는 귀가 아닌 눈을 통해서 악기의 음색과 선율을 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