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손현숙 작품전 22. 4. 20 - 4. 25 갤러리라메르

유영(遊泳) 미감, 물고기가 만난 공존의 색
발표되지 않는 신작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붉은 계통과 푸른 계통의 물고기 그림이다. 작가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유행과 관계없이 추상과 구상이 교차하는 자신만의 ‘환상주의적 추상이미지’를 구현했다. 유영하는
물고기들 사이의 독창성은 40년 이상의 화업(畫業)에서 오는 오랜 작업의 결과다. 가정을 지키면서 화가로서의 독립적
인 영역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작가가 편견을 묵묵히 넘어서며 여성성에 한정되지 않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고 굳건
히 지켜낸 것은 “글 쓰는 이에게 독자가 있어야 하듯, 화가는 그림을 사서 감상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라는 남편의 솔직
한 비평 때문이었다. 첫 개인전부터 잘 팔리는 그림은 꽃 정물화였음에도, 다양한 대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집에서 오랜 시간 키우던 어항 속 물고기를 관찰하면서 이를 내면화하여 자
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만든 것은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한 탓이다.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이 있다. 물고기는 물을 만나 살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물고기는 물
을 만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손현숙 작품에서 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흐른다. 레드시리즈와
블루시리즈에서 물과 물고기는 약동하는 생명력 자체로 기능한다.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주는 이들의 정반합(正反
合)은 금빛과 어우러진 멀티시리즈로 이어진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가듯, 작가는 그리는 행위 속에서 절대
적 자유를 만끽한다. 물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만물은 하나가 되듯이, 숨통이 트인다는 것은 사회적·관념
적 구속(拘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린다는 것은 절대적 자유의 획득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고기 시리즈는 아
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인위적 개념을 가로질러, 우리를 속박해 왔던 고정관념을 순식간에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름 없는 물고기들에게 바치는 색에 대한 공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 속의 여성’으로서 뿌리칠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공
감(共感)에서 비롯되었다. 여름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청색조의 물고기 그림들은 몇 차례의 조색(調色)과 붓질을 거
듭한 끝에 하나의 색조로 고정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색은 작가 특유의 감수성과 닮아있다. 작가는 다양한 방향을 오가는
붓질의 반복 속에서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와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다. 한 색조로 보이는 그림들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빽
빽하게 칠해 놓은 물감 아래로 보이지 않던 희미한 색감들을 드러낸다. 그 안에서는 희로애락을 살아낸 작가의 인내와 삶
의 순간들이 다양한 형용사처럼 살아 숨 쉰다. 무엇보다 매력 있는 그림은 멀티시리즈로, 마치 작가의 감성색상을 보여주
는 것 같다. 하지만 캔버스를 채우는 것은 고귀하면서도 빛바랜 그리움의 기억이다. 그것은 풍경에서 온 색 일수도, 물고

기자체에서 온 색 일수도, 혹은 실재가 아닌 그윽한 기억의 색일 수도 있다. 작가는 오랜 삶의 기억을 ‘물고기의 자유로운
유영’에 빗대 표현한다. 손현숙의 여성인물화가 자신을 투영한 젊은 작가정신이라면, 물고기 시리즈는 삶의 관습에서 벗
어난 작가의 꿈을 상징한다. 색과 경험을 뒤섞은 구상과 추상의 유연한 결합은 비정형적인 구성 속에서 관람자의 적극적
인 상상을 유도한다. 작가의 물고기 시리즈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 속에서 무뎌진 우리 모두의 감각을 일깨움으로써, 진정
한 자아를 찾게 하는 일종의 마법 같은 주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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