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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事蹟
始祖大輔公二十八世 有諱傅 後唐明宗天成二年丁亥 甄萱入寇王都 弑景哀王 朴氏 立
王表弟金傅爲王 後唐潞王淸泰二年乙未 麗祖 討甄萱平之 因逼雞林 國弱勢孤 太子諫
背城一戰 王曰 其奈無罪蒼生何 遂擧土附麗在位九年 麗朝 封王爲樂浪公 位在太子上
妻以 樂浪公主 國除爲慶州 賜爲食邑麗景宗元年 又加尙父其冊詰略曰 英烈振凌雲之氣
文章 騰擲地之才 云云 諡敬順雞林之民 不忘其德 立祠祀之前妃朴氏生三男一女 太子
人皆骨山 麻衣草坐 以終其身 次季子 棄妻入海印寺 爲山人以終 名梵空子雲發 爲羅
州金氏 三子史失名 號永芬 後妃王氏 麗祖前妃所出也 生五男 曰殷悅爲慶州金氏 曰
錫義城君 曰鍵江陵君 曰鐥彦陽君 錘三陟君
<사적해석(事蹟解釋)>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 28세(世)에 휘(諱) 부(傅)가 계시니, 후당(後唐) 명종(明
宗) 천성(天成) 2年 정해(丁亥=西紀 927年)에 견훤(甄萱)이 왕도(王都)로 쳐들어와
서 경애왕(景哀王)을 시해(弑害)하니, 박씨(朴氏)들이 왕(王)의 표제(表悌=外四寸)인
김부(金傅)를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후당(後唐) 노왕(潞王)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에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평
(討平)하고서 계림(鷄林)을 핍박(逼迫)하나 나라가 약하고 세(勢)가 고단(孤單)하였
다. 태자(太子)가 간(諫)하여 성(城)을 등지고 한 번 싸우자고 하였으나 왕은「그
죄 없는 창생(蒼生)을 어찌하랴?」하고 드디어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에 부치니
재위(在位) 9년이었다.
고려 태조가 왕을 봉하여 낙랑공(樂浪公)이라 하니, 지위(地位)는 태자(太子)의 위
에 있었다.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고 나라를 덜어 경주(慶州)라 하
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고 고려 경종(景宗) 원년에는 또 상부(尙父)의 칭
호(稱號)를 더하니 그 책고(冊誥)에 대략 이르기를
「영렬(英烈)함은 구름을 능가(凌駕)하는 기(氣)를 떨치고, 문장(文章)은 땅을 투척
(投擲)하는 재주를 드높였다.」운운 하였다. 시호(諡號)는 경순(敬順)이다. 계림(鷄
林)의 백성들이 그 덕을 잊지 아니하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받들었다.
전비(前妃) 박씨(朴氏)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태자(太子)는 개골산(皆骨山)으로 들
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풀 자리에 앉아 그 일생을 마쳤고 다음 계자(季子)는 아내
를 버리고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산인(山人=僧侶)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름
을 범공(梵空)이라고 하였다. 그 아들 운발(雲發)이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始
祖)가 되었다. 셋째 아들은 역사에서 실명(失名)하였는데 호(號)를 영분(永芬)이라
고 하였다.
206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