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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11월 11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함허정涵虛亭                                 약하면 오덕으로 대비하고 천지일월이 다 내 마음 속의

                                                                                                                   『김해읍지』 공해(公廊)조에 “연자루의 북쪽에 있는                        물건이다. 사특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자기 몸의
                                                                                                                   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지은  것이다.  호계의  물을                 눈을 잃고 모든 일의 쓰임새를 어기게 되고 마음에 응
            이어서>>>                                            장이었다. 남명 선생의외손서(外孫婚)이기도 했던 그                         끌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하여 정사(政事)에 통달하면 불결하지 않을 것이다.
                                                              는 난이 일어난 지 열흘 후인 1592년 4월 23일 고향
                                                                                                                                                                       공무가 끝나 아전들은 흩어지고 온갖 시끄러움도 끊어
                                                              인 의령에서 집안의 노비, 이웃 장정, 흩어진 관군들                        맑고 깨끗하다. 만력 을묘년(乙卯年, 1615)에 부사 조                    져 정자에 오르니 바람과 달이 쌍으로 맑은데 물이 허
                                                                                                                   계명(曺發明)이 중창하고 정묘년(丁卯年, 1687)에 부사
            선조는  또한  경상도에서는  ‘글(文)을  읽는  자식은  을 끌어모아 창의했다.                                                         이행익(李行益)이 중수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최윤신                      (虛)를 채울 수 있으며 허(虛)가 물을 채울 수 있겠는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힌 자식은 마당에 앉힌다고  당시 일본군은 이미 김해, 창원, 칠원 등을 함락시키                                            은  『읍지』  환적(廣)조  보유(補遺)편에  “홍치(弘治,                  가.  어공(魚公)의  작명이  이제  이름이  되어  최부사가
            지적한 뒤 ‘전쟁이 일어난 것은 경상도의 책임이 크                      고 현풍 등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관군은 변                         명나라의 연호) 무오년(戊午年, 1498)에 함허정을 처음                    즐거워하니 그가 보통의 풍류객이 아님을 알겠다.
            다’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변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했을 뿐더러 대부분의 지                         건축하였다.”고 적고 정무(政務)는 청렴하고 간략함을                       부사가 청하였으니 묵묵히 앉아 고요히 살피며 마음을
            이와 같은 경상도 지역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무예와  휘관이나  지방  수령들은  가솔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위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폭군 연산군 4년에 청렴                      맑게 하고 생각을 맑게 하여 마음의 본체에 구하며 사
            병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를 연마하라고 제자들에                      상황이었다.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백성들에 대한 관                         한 관리가 김해에 와서 함허정까지 지었으니 감사할 업                       소한 찌꺼기도 마음에 걸리지 않아야 하고 이로서 천연
            게 강조했던 남명의 가르침은 분명 새롭고, 선구적인  의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지휘관을 잃                                             적일 것이다.                                             비약의 묘를 얻는 것은 이치로 통하는데 매우 필요하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은 백성들 역시 우왕좌왕하면서 도주해 버리거나, 상                         연자루 북쪽의 호계천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었다고                        라.
            뿐만 아니라 남명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의  당수는  생존을  위해  부일(附日)  협력자로  변신하는                                          하니 함허정 역시 지금의 동상동 연화사 주변으로 짐작                       이곳이 깨끗함으로 글을 숭상하고 지나가는 길손이 칭
            준동 가능성을 경고하고, 그에 대해 강력히 대비하라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찬하고 기릴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다.
            고 촉구한 바 있었다. 당시 남명이 거주했거나 그의  충군애국(忠君愛國)  정신이  투철했던  곽재우가  보기                                          조선 문신들이 함허정을 찾아 노래한 시(詩)를 다루기                       내 쇠퇴하고 병들어 물 난간에 기대었는데 하늘 빛 구
            발자취가 미쳤던 김해, 산청, 합천 일원은 부산, 동래  에  이  같은  지방  수령이나  방백들의  행태는  도저히                                     전에 『읍지에실려있는 「탁영(望樓) 김일손(金係) 기                       름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려 맑은 물을 움켜쥐고 활수의
            등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이었다. 자연히 당시 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가산을 털어 마을                         (記)」  「남명(南冥)  조식(曺植)  기(記)」  「관은(灌                 근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함허의 경개를 써서
            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왜관(倭館)의 움직임이나 그                      사람들을 규합하여 병력을 확보하는 한편, 붉은 비단                         隱) 박홍미(朴美) 서(序), 「명연(明淵)유여각(柳汝恪)                    돌아가게  하니  최부사  이름은  윤신(潤身)이요  자(子)
            를  통해  흘러나온  대마도(對馬島)나  일본의  소식을  옷을 지어 입고 군기를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홍의장                                          서(序)를 번역문으로 차례로 싣는다.                                는 모향인(鄕人)이라 집안이 대대로 분수가 있고 또한
            접하는 것이이지 않고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군(紅衣將軍)이라 칭하면서 위세를 드높였다.                                                                                                      나의 향국(鄕國, 본관)의 부사이기에 의(義)로서 쓰지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명의  우려와  경고는  그가  이에  따라  곽재우의  휘하에는  의령  인근의  삼가(三                                   함허정기(涵虛亭記) - 김일손金期孫                                 않을 수 없구나.
            세상을 떠난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생함으로써 현실                      嘉),  초계(草溪)  등지에서  전직  지방관과  무장들이
            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남명의 휘하에서 가르침을 받                      모여들고, 병사들의 숫자 역시 급격히 증가해 갔다.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스물 여덟 번째
            았던 남명학파의 문하생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곽재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참모로 활용하                                               금관(김해)은 옛날 나라여서 기이한 자취가 많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                       는 한편 전체적인 조직의 형태를 전투 수행을 원할히                         이제 김해부사 최후(崔, 최윤신 부사의 존칭)가 연지루
            다. 다른 지역보다 빠르고,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더                    할 수 있도록 편제했다.                                        를 새롭게 하였으니 무릇 옛 나라의 문물을 꾸미는 까                       탁영(緩) 김일손(金關係, 1464~1498)은 김해인으로 조
            욱이 당시는 1555년(명종10)에 일어난 을묘왜변(乙卯                   곽재우는  의령의  정암(鼎巖)  나루를  근거지로  삼아                     닭이 극에 달하였다. 연자루의 북쪽 파사탑 남쪽에 네                       선초기의  학자요  문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倭變)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                유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고,                         모난 연못을 만들어 호계의 물을 끌어 들였고 물이 돌                       1486년 성종 17년 7월에 진사,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던 시대였다. 경제적으로  일본 수송선단의 활동을 방해했다. 특히 1592년 5월                                           아서 나가는 곳에 아름다운 섬을 만들고 물결의 중심에                       2등으로 급제해 춘추관 기사관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
            자급할 수 없었던 대마도와 일본 서부지역의 왜인들                       하순,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 나루로 침입해 오던 소                         대를  쌓아  집을  짓고  그  위에  띠풀을  덮었다.  정자의  갔다가 곧 사직하고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어 학문의
            은 조선 정부에게서 보다 많은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                      조천융경(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                      물결을 가로질러 길을 내고 그 속에 고기를 기르며 연                       연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기 위해 호소와 협박을 일삼았고, 때로는 그것이 군                      는 그가 의병을 일으킨 이후 거두었던 최초의 승첩이                         꽃을  심었으니  각종  물새는  여유롭게  날고  앉게  하였                 들어가  정여창(鄭汝昌),  강  혼(姜舜)  등과  깊히  교류
            사적 알력으로 이어져 경상도 연안지역의 긴장은 높                       자 의병들의 활약상 가운데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다.                                                  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나서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아져 가고 있었다.                                        있었다. 이후에도 곽재우는 현풍, 영산, 창녕 등의 수                       작은  배에  기생과  풍악을  싣고  연못의  중앙에서  손짓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이조정랑  등을  지내면서도  휴
            남명은 이처럼 심상치 않았던 당시 일본인들의 동향                       복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하며 뱃놀이 노래 부르게 하고 부사는 귀한 손님 맞이                       가 때는 독서로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주로 언
            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에게,  곧  닥칠지도  일본군은 우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                                        하여 즐겁게 마시게 하니 사람들이 보기에 물속의 신선  관(言官,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
            모르는 전란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는가 하면 조정에  었고, 그것은 결국 우도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진                                              같더라.                                                를 비판하며 권귀화(權貴化, 권세 있는 귀족화)를 공격
            대해서도 일본인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강력히 응                       출하려던 그들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누각의 모습과 성곽, 산의 뾰족 뾰족한 봉우리 해와 별                      하였고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도왔다.
            징하라고 촉구하는등 일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라                       곽재우 의병의 이 같은 활동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과 구름이 모두 그 가운데 거꾸로 비치고 부사가 좌상  그러나 연산조 4년(1498)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
            고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종(明宗), 선조대에 이                    지닌다. 그의 창의와 승첩은 우선 흩어진 민심을 수                         어공  세겸(魚出謙,  1430~150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數)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의해 7월
            르기까지  조선  조정은  일본  내부의  변화에  대해  별                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왜란 초 경상 자연                         김해 출신이다. 문과 급제 이후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                     12일부터  7월  26일까지  신문을  당한  후  권오복,  권경
            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일                       히 의령을 비롯한 우도 일원에서 곽재우의 위신은 점                         지를 거쳐 이·병·예조참판, 대사헌, 경기 평안도관찰                       유, 이 목, 허 반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중종반정
            관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명의 우려와 경고는  점 높아가게 되었고, 조정 역시 그의 공적을 인정하                                             사, 한성 부좌윤, 병·형·호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내                      때 복관되어 홍문관 직제학, 현종때는 도승지, 순조 때
            그가 세상을 떠난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생함으로써  이 형조좌랑, 성주목사, 진주목사, 방어사 등의 관직                                            고 연산군 때 우의정을 거쳐 1496년 좌의정에 올랐다.)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현실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남명의 휘하에서 가르침을  을 잇따라 내렸다. 자연히 그의 휘하로 모여드는 의                                             에게 이름을 청하자 함허로 명명하였다.                               함허정의 기문을 보면 탁영은 최윤신 부사의 부탁으로
            받았던 남명학파의 문하생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                       병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 때문에 곽                         홍치 무오년 중하(仲夏, 5월)에 내 이미 상(喪)을 벗고  김해로와서 죽임을 당하기 2개월 전인 5월에 기문을 썼
            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던 것                      재우와, 당시 권위가 실추되고 있었던 관원들과의 사                         도주(道州, 청도)로 가서 조상의 무덤을 찾아 본 후 무                     으니, 함허정과 기문의 훼철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다.                                               이에는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한 예로 곽재우는 경                         덤 곁의 농막에 쉬고 있었다. 부사가 찾아와 나를 김해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를 비판하며 세조의 즉위를 업고
                                                              상감사 김수(金賥)와 심각한 알력을 빚기도 했거니와                         부 성으로 맞아들여 함허정을 관람시키며 기문을 쓰라  배출된 공신들을 부정한 사림의 표상이 34세의 젊은 나
            2. 남명학파 주요 의병장의 활동                                김수는 곽재우를 조정에 무고한 적도 있다.                              했다.  그러나  쇠퇴하고  병들어  남은  인생이  지루하고  이로 남긴 마지막 작품이 함허정기라서 더더욱 가슴이
                                                              다.  이것은  의병장  곽재우의  공적과  명망은,  경상감                   세상에 있는 것 보다 산관야복의 강호 생활이 알맞은데  아픈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명의 문인들 가운데 의병장으로,  사라는 지방 장관의 견제를 받을 만큼 큰 것이었음을                                             성으로 둘러싸인 부(府)가 겁나고 한지와 붓만을 보아                                   다음호계속>>>
            혹은 의병장 휘하에서 종군했던 인물들은 대단히 많                       반증한다고 하겠다.                                           도 내키지 않아 사양했다. 부사가 받아 주지 않아 잠시
            았다. 그 가운데서도 휘하 병력의 규모나 활약상으로                                                                           후에 기록하겠다 했다.                                                                            김해일보
            볼 때 단연 주목되는 인물은 곽재우 (1552~1617)와                                     다음호계속>>>                          물의 성격은 두루 흘러 막힘이 없으나 몸은 쇠하여 약
            정인홍, 김면(1541~1593) 등이다.                                                                                하기 때문에 함몰하였을 것이며 웅덩이나 길바닥에 흐
                                                                                                                   르는 탁류라도 능히 마른풀을 띄울 수 있으나 그 성품
            1) 곽재우                                                                                                 을 막으면 물을 채운다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사
                                                                                                김해일보               람이 한 마음이 되면 크게 발전하고 몸이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



                                        (재)김해문화재단, 2020 무지개다리사업


                                          ‘N개의 삶’토크 콘서트 참여자 모집


                                11월 14일(토), 21일(토) 비건&동물권, 무자녀기혼자, 생활공동체(비혼), 환경 주제로 강연
                                            김해무지개다리사업 유튜브 계정 온라인 생중계 및 문자통역 진행

          (재)김해문화재단은 2020 무지개다리              모든  강연은  무료로,  코로나19  확산
          사업의 일환으로 오는 11월 14일(토)             에  따라  대면뿐만  아니라  비대면으
          와 21일(토)에 ‘N개의 삶’토크 콘              로도 강연을 즐길 수 있다. 김해무지
          서트를  김해다어울림생활문화센터  4               개다리사업  유튜브  계정을  통해  생
          층에서 개최한다.                          중계되며  문자통역을  진행해,  정보
          ‘N개의  삶’토크  콘서트는  N개의  접근성을  높일  예정이다.  대면  행
          선택과 가치관으로 N개의 삶을 살아                사  참여  사전  접수는  11월  5일(목)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경험 확장의  부터  인터넷  링크(https://forms.
          시간을 마련하고자 기획되었으며, 4가               gle/z5VfsyGBLePYz5Ax5)를
          지 주제로 토크 콘서트가 펼쳐진다.                통해  가능하며,  회차별  선착순  25
          먼저  14일(토)에는  두  개의  북토크           명씩  모집한다.  비대면  행사  참여
          가 열린다. 14시에는 비건과 동물권을  도  별도  접수를  받는다.  접수는  인
          주제로 『나의 비거니즘 만화』 저자  터넷  링크(https://forms.gle/
          보선의<어서오세요,  비거니즘의  세계              vQh2pKEiByLmf5NB6)로  신청하
          로>  북토크가,  같은  날  17시에는  무         면 되고, 인원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
          자녀  기혼자(딩크)를  주제로  『엄마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재단  홈페
          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최           이지  및  전화(055-320-8580/1220)를
          지은과 <아이 없는 결혼 생활은 어떨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까?> 북토크가 진행된다.                     한편,  (재)김해문화재단은  2020  문
          또한  21일(토)에는  두  개의  강연이  화다양성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혐오
          열린다.  14시에는  생활공동체를  주제            표현과  관련한  ‘말모이’프로젝트를
          로,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통해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홍혜은  대표와  <나를  바꾸고,  곁을  수상한 바 있다.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기혼> 강연이,                                     윤갑현 기자
          같은 날 17시에는 환경을 주제로 성                          gimhae114@naver.com
          남환경운동연합 김현정 사무국장과 <
          우리가 지켜야할 자원순환을 위한 예
          의_쓰레기 德(덕)질> 강연이 진행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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