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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9월 23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연자루(燕子樓) - 맹석흠孟碩欽
先祖遺墟認幾春 선조유허인기춘
寶欄朱閣闃芳塵 보란주각격방진
百年往事憑誰問 백년왕사빙수문
이어서>>> 때문이라 했 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째에 있다. 두 園素蒼茫似語人 원소창망사어인
번째와 같은 요새를 갖고 있는데도 불 구하고 왜구가
국토를 유린하여 백성이 심각한 곤란에 빠지고 말았 선조 남기신 터에 몇 년 만에 찾았네
다는 것이 다. 그러니 남명은 우리의 몸과 같은 국토 보란 주각이 더없이 아름답고 고요한데.
남명의 국도 사랑 정신은 이민족에 대한 확고한 경 산하를 왜구들이 유린하고 있다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나간 백년의 일 누구에게 물을까
계의식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난명이 살았던 당 증폭시켰다. 그의 작품 속에 '대마도가 자주 등장하 원구단본디대로 있어 아득한 옛일을 말하듯 하다.
대는 북으로 야인이, 남으로 왜구끊인없이 보다 질하 는 것도 모두 이같은 문제의식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
였다. 이에 대하여 남명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재 다. 남명은 급기야 제자들에게 병 법을 가르치는 한 작가 맹석흠은 좌의정(左議政) 맹사성의 증손으로 연자루(燕子樓) - 맹주세孟貴世(世는 瑞다)
자들과 이민족의 격퇴 를 논의하기에 이른다. 남명은 편, 국난타개를 위한 대책을 묻기에 이르렀다. 1429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모른다. 세조(世祖)때
《동국통감》을 읽으며 우리의 역사를 명화히 인식하 의 무신이었다. 무 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 重建高機海上春 중간고루해상춘
고, 국토산하의 여러 곳을 오가며 여기에 대하어 에 우리의 국토산하를 유린하는 왜적에 대한 방책은 '책 를 지냈다. 세조 13년(1467) 5월 이시애(李施愛)의 반
징어린 눈길을 보낸 다. 가락국의 수도인 김해에 산 문제(策問題를)‘ 통해 고민하였다. 왜구들이 제포를 란을 제압하고 이시애를 참수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 烏衣豈解有兵塵 오의개해유병진
해정을 시이 놓고 생활하면서 수로왕을 떠올리 기도 자신들에게 돌려 달라는 것이나 대장경을 인출해 갈 功臣) 2등에 봉해졌다. 11월에는 건주(建州) 를 정별한 祖先當日題名處 조선당일제명치
하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지나며 포석정에 들러 것을 요청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조정의 의사를 타진 공이 1등으로 꼽혀 3계급 승진했다. 가선대부에 올라 恨未歸爲倚眺人 한미귀위의조인
신라의 멸망을 인 타까워하기도 한다. 또한 고령에 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우리를 우롱해보자는 심산이라 신창(新昌君)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관병(官兵)을 사사
살았던 매무인 정사현(鄭師賢,1508-1535) 을 찾아가 고 보았다. 그리나 조정에서는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 로이 부렸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여산에 중도부처(中
서는 주산에 있는 가야왕들의 무덤을 보면서 옛 일을 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도적에게 예 途付處) 되었으나 곧 직첩을 돌려받았다. 1480년(성종 높은 누각 다시 세운 바다위에 봄이 왔네
회고하기도 하 고, 죽연정에서 본 가야산과 낙동강의 물을 주려고 한다면서 유약한 조정을 비판하고 있다. 11)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으나 그 뒤의 기 오이향이 어찌 풀어져 병란이 있었는가.
어울이심에 대하여 감동하기도 한다. 특 히 투어 걸 이같은 사태의 원인은 조정 내부에 있다고 했다. 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증조부 맹사성이 김해를 찾
음에 가쁜 숨을 내쉬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는 삼가 아 연자루에서 시를 남겼음은 연자루의 경승을 다시 느 선조께서 그 옛날 시 지었던 곳에서
식현 (三呵息峴) 에 올라 국토산하를 감회이린 눈길 왜구들과 결막한 역관이나 신하 혹은 내시들이 정보 끼게 한다. 애석해 돌아가지 못하고 기대어 사람을 본다.
로 내려다 보았다. 이 때문에 국토를 유린 하는 이민 를 팔았기 때문에 대책을 논의한다고 하더라도 왜구
족, 특히 왜구에 대한 분노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 가 먼저 안다는 것이다. 이에 남명은 왜구를 제압할 연자루(燕子樓) - 맹세형孟世衡 작가 맹주서는 광해군 14년(1622)에 맹세형의 아들로
다. 인재가 우리 나라에 없음을 한탄하고 자신이라도 나 태어났 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으나 선조 맹사성,
서서 여기 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 遺篇高擖擬千春 유편고갈의천춘 아버지 맹세형과 연자루 시를 통해 가야왕조와 김해의
서로 더불어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쪽에 파랗게 가장 운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大厦飜成一炬塵 대하번성일거진 아름다움을 높여준 시인이 요 정치가다. 1654년 식년
높이 솟은 것은 남해의 뒷산이고 바로 동쪽에 물결처 推有玄禽知社日 유유현금지사일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을 시작으로 1673년 우승지, 병
럼 널리 가득 차서 서리어 엎드린 것이 하동 · 곤 요컨대 남명의 국토산하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의 궤 歸來不見捲簾人 귀래불견권렴인 조참의를, 1678년 안동부사시 선정을 베풀어 가선대부
양의 산들이다. 또 동쪽으로 은은하게 하늘에 솟아 적과 밀착되어 있다. 내륙과 해안, 서울과 지방을 오 여 오로고 특진관에 올랐다. 아버지 맹세형으로부터 선
서 검은 구름과 같은 것은 사천의 와룡산이다. 그 사 가면서 우리 국토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함께 그 속 남기신 글귀 높이 길려 천년을 기약하더니 조(맹사성)의 시판이 연자루가 불타버려서 김해부 별관
이에 혈맥과 같이 서로 웨이고 뒤섞여 엉킨 것은 과 에 사는 민초(民草)들의 애환을 절감하였던 것이다. 번듯하게 큰 집 불 한번에 티끌이 되었네. 에 걸어 두었으나 살펴보라는 말을 들었으나 바쁜 관직
바다와 포구가 경락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남명은 여기에 바탕 하여 국토를 생명있는 하나의 유 오직 까마귀는 사일을 알고 있어 수행으로 찾지 못히고 있었다. 변국한 김해부사가 연자
우리 나라는 산하의 긴 하이 위나라가 보배로 여기는 기체로 파악하였다. 변함없이 돌아오는데 주렴 걷던 미인은 보이지 않네. 루를 중창하였는데 건물 이 장대하고 아름다움이 으뜸
것 이상이어서, 만경 너른 바다에 다달아 있고 백치 이라는 소식에 김해부를 찾아 선조 와 아버지의 관을
(百雉)의 성곽에 의기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거듭하 즉 국토산하를 우리의 몸 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작가 맹세형(1588~1656)은 맹사성의 8세손으로 조 가져오게 하여 이 시와 함께 연자루에 걸게 하였으니
여 백성들이 조그맣고 추잡한 섬 오랑캐에게 곤란을 이는 우리의 국도가 인간의 탐욕스러운 물질석 만족 선 후기의 문신이다. 1623년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하 이 사는 1677년의 작품으로 느껴본다. 안타깝게도 연
겪고 있다. 그러니 이찌 그 옛날 길쌈하는 실이 적은 축구의 공급원도 아니며 어떤 외세에 대한 폭압적 침 여 성균관 학유를 시 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울산부사 자루와 함께 에 자주 등장하듯 “티끌”이 되었음을 한
것은 돌아보지 않고 주나라 왕실이 멸망할 것을 근심 탈행위를 받을 그 어떤 것도 아닌 사랑하고 공경해야 때 “백성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 시 먼저 절용해야 한 탄할 뿐 이다.
오랑캐들이 국토산하를 유린하고 있으니 남명은 고민 극진히 모시며 백성들에게는 양로의 잔치를 베풀어 민
한 과부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할 대상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많고 추잡한 섬나라 다.”며 절약에 모범이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위의 글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다음 세 가지다. 첫 번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속을 교화하였다. 봉상시정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째, 국토산하를 사람의 몸에 비유했다는 점, 두 번째, 이 시는 작가의 시서(時序)에서 느낄 수 있지만 임진 다음호계속>>>
국토는 대단히 견고한 요새와 같다고 한 점, 세 번 남명은 여기에 대한 대책문제를 제자들에게 심각하게 왜란 후에 김해에 와서 연자루에 걸려 있다전화에 불
째, 왜구에 짓밟혀 백성이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 점 물었다. 우리는 여 기서 남명의 국토 사랑 정신이 백 탄 선조(맹사성)의 시판을 손질한 후 김해부의 별관에
이 그것이다. 첫 번째에 서 남명은 그 자신이 얼마나 성 사랑 정신과 밀착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걸고 그 왼쪽에다 이 시를 걸 었던 것이다. 당시의 김 김해일보
국도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해부사는 조 즙(趙 濈) 이었고 그의 아들 맹주서 역시
즉, 먼저 동남쪽으로 솟아 있는 남해의 뒷산, 동쪽으 시서(詩序)에서 “정묘년(丁卯年, 1627)에 맹세형 이
로 펼쳐진 하동과 고양의 산들, 그리고 사천의 와룡 말을 타고 김해부에 갔다”고 적고 있어 맹세형의 연자
산을 둘러보면서 그 사이에 있는 강과 바다 또는 포 루는 1627년의 작품이다.
구들이 혈맥과 경락처럼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호계속>>>
까 남령은 산을 우리의 몸에, 강과 바다를 우리의 몸
을 흐르는 혈맥과 경락으로 보았던 것이 다. 이는 국
토산하를 생명력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두 번째에서 위나라의 험한 김해일보
지세와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의 지세는 위나라 이상 안개/곽 구비
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넓은 바다와 높은 산이 있기
물안개가 습관적으로 피어난
도시 도심의 오전이
◆곽 구비 프로필◆
희뿌연 이유를 소양호가 책임질 일인가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신정문학&문인협회 고문
남명문학회 회원 출근시키고 남겨진 여인네들이
하운문학&작가협회 회원 허우적대며 꿈틀거릴 때
한국스토리문인협회 정회원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시간에도
제9회 강원경제신문 누리달 공모전 대상 수상
저서 시집: 1집 푸른 들판은 아버지다. 커피 잔 위로 우울한 샹송을 터트리고 싶어 한다
2집 사막을 연주하다
3집 가시 박힌 날
여태 도시의 익숙함에도
4집 자연의 들러리로 살고 싶다 외 다수
런던인가 착각을 하며 모자를 눌러 쓰고
◐시 평/시인 박 선해◑ 힘차게 걷어 올리는 것 같다.
경계심 없이 거리로 기웃기웃 나가면
서울에서 춘천으로 삶을 이전한 초 전체적으로는 외지로 터전을 옮긴
봄, 남편을 출근시키고 집에 남아 상황에 안개라는 단어로 신비적 한산함으론 분명 런던은 아니었지
낯선 타향에서 고독함뿐이었다고 환경을 업고 있다. 적응해 가는
시인은 토로 했다. 그런 주부의 일상을 긍정으로 고요히 담아 가고
안개가 흘리고 간 젖은 눈물이
일상에 베란다는 해가 뜨지 않고 있다.
오후나 되어서야 환해지기 일쑤라 시는 소녀 적 감성으로 쓰여 지고 가로수에서 흩어지면
온통 더 한다. 춘천은 물의, 호반의 어디선가 밝은 꽃잎이 하늘하늘 드디어 환한 낮이 되고
도시이다. 여기서 시는 낯선 생활에 날아 올 듯하다. 호연하게 지낸
그렇게 한나절을 겁탈 당한 시간은
대한 진솔한 사유를 이끌었다. 한나절에는 오후의 향기가 젖어
별일 아니라는 듯
시인의 성향은 서구적 지성을 든다.
지녔다. ‘우울한 샹송을 터뜨리고 느릿한 소도시에 일상이 그제 서야 시작이다.
싶어 한다.’
에서는 창가의 무거운 차양 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