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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이야기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11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연자루(燕子樓) - 신복하申復夏
燕子樓前燕子飛 연자루전연자비
年年社日有情歸 년년사일유정귀
憑渠欲問興亡事 빙거욕문흥망사
이어서>>> 기이함만 못하다’ 라고 하였고, 채권당에서는 뛰어난 惟見四陵映夕暉 유견서릉영석휘
향기를 하는 로 전해주고 싶은 나 땅에는 먼지와 노아
아득하여 그렇게 한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이는 모두 연자루 앞을 나는 제비는
빼어난 경치 속에서도 끝없이 하토에서 삶을 영위하고 해마다 사일(E)이면 정으로 돌아오는데
2) 국토순례의 길 아침노을 저녁 안개 빈 누각에 들어오니
있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남명 고뇌의 어찌된 일이냐고 홍망사를 묻고 싶으나
남명은 국도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에 마땅히 봉래, 영주를 합작한 그림이다.
일단이라 하겠다. 오직 석양이 비추는 서릉(, 수로왕릉)을 바라본다.
오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국토산하의 아름다움을 산은 비 개인 구름을 걷어 새로운 경치를 내어놓고
이 순례에서 경주에 들러 옛 신라의 유적을 두루
절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를 시키지 강은 객수(가 더하여 옛 소리가 외롭다.
살펴보기도 했다. 포석정에 들렀을 때는 만감이 작가 신복하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가야왕국에 대한
아니하고 끝없이 현실세계와의 긴장 속에서 국토산하
교차하였다. <포석정 (鮑石亭)> 이라는 칠런절구는 향수가 짙 게 느껴져 온다.
이하 하였다. 일찍이 유두류록 (遊頭流錄) 에서 산과 眠鷗岸上皆漁子 면구안상개어자
이렇게 짓게 되었다. 남명은 이 작품에서 ‘단풍 든
물을 보면서 인간과 시대 본다. 라고 했던 것에서 秧馬原頭盡野夫 앙마원두진야부
계림 벌써 가지가 변했으니, 견휜이 신라를 멸망시킨 차 연자루 판상운(次燕子樓板上韻)- 김건수金建銖
이같은 사실은 잘 드러난 바다. 전자는 국토산하를 憂樂非關天下事 우락비관천하사
것 아니라네,
본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一身康濟也無疑 일신강제야무의
포석정에서 대권의 군사가 망하도록 자초한 것이니, 南來又見一年春 남래우견일년춘
여기시 우리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을 중시하는
이 지경에 이미 임금과 신하도 어쩔 계책 없는 법’ 雨後江山洗劒塵 우후강산세검진
국토산하에 대한 남명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 갈매기 졸고 있는 강 언덕에 어부들.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견휜이 후백제를 세우고, 斜日城西怊悵意 사일성서초창의
하게 된다. 앙마 놓인 언덕 머리앤 농부들이라.
신라를 공격,포석정에서 연회 중이던 경순왕을 자살케 可憐埋沒古今人 가련매몰고금인
남명의 국토순례는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다. 우선 근심과 즐거움은 천하 일과 관계없으니
한 사실을 들어 지은 것이라 하겠다. 남명은 여기서
자신이 살았던 합천,김해,지리산을 중심으로 많은 일신을 편안하게 하는 본분을 의심해 무엇 하리,
포석정 안에서 극도에 달한 사치와 주연을 벌인 군신 남쪽에 와서 또 한 해의 봄을 본다.
여행을 하였다. 남명이 산수를 지나치게 좋아했다고
스스로가 신라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지 건휜이 신라를 비온 뒤 강산은 전쟁의 상처를 씻었네.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언급한대로 남명은 거기서 작가 김건수 (1790-1854)는 조선 후기의
멸망시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황혼에 성의 서쪽이 슬픔에 젖어 있는 것은
역사를 발견하고 그 역사와 관련된 사람을 이해하기 문신이요학자다. 1830년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한 후
국토산하에 스며 있는 비판적인 역사읽기를 시도하며 가엾게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를 묻었기 때문이다.
위하여 노력하였다. 매부 정사현(鄭師賢)이 있는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 응교와 김해부사, 승정원
오늘을 경계하자는 남명의 의식을 이해하게 된다.
고령, 친구 칠봉 김희삼(金希參), 황강 이희안(李希 나주로 순례의 길을 나선 것은 덕산에 살던 燕子樓前燕子飛 연자루전연자비 우부승지를 역임했다. 경연에서 임금 에게 정치의
顔 ), 사미정 문경충(文敬忠) , 송계 신계성(申季誠) 때였고, 63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나주에 雙雙飛去又飛歸 쌍쌍비거우비귀 요체와 중농정책, 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上奏)
등이 사는 성주나 초계,, 그리고 합천의 대병이나 밀양 남명의 자씨(姊氏)가 살았기 때문인데 그 아들이 微禽詎識興亡恨 미금거식흥망한 하였다.
打鼓峰頭落日暉 타고봉두낙일휘
등지를 찾아갈 때도 이같은 논리가 적용되었고, 영천( 바로 이준민(李俊民) 이다. 이준민(李俊民)이 1851년 5월 30일 김해부사로 임명되어 7월 2일
永川)지방이나 나주(羅州)지방으로 여행할 때도 같은 모친을 모시고 나주목 (羅州牧) 에 부임했을 때, 연자루 앞을 나는 제비는 도임하였으며 1852년 7월 22일까지 근무했는데
논리가 엄격하게 되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남명이 산청 과 함양을 지나 남원, 다시 담양과 쌍쌍이 날아갔다 날아온다. 『읍지』 에 많은 시를 남겼다.
국토산하를 인식하면서,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광주를 거쳐 나주에 도착했다. 남원을 지날 때는 미물인 날짐승이 어찌 흥망사 한을 알까? 부사 재임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보냈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생면(周生面), 영천리(嶺川里)에 있는 타고봉 머리에 저녁 햇살 비치네.
남명이 김해를 출발하여 밀양과 청도를 지나 사계정사 (沙溪精舍)에 묵었다. 이 때 집주인
영천지방으로 순례의 길에 오 른 것은 42세경이었다. 방응현(方應賢,1524-1589) 에게 소반에 비친 朝霞夕霧雜空樓 조하석무잡공루 다음호계속>>>
당시 청도에는 설친한 친구였던 삼족장 김대유(金大 두류산을 먹어도 다함없으니 휜 옷 입고 늘 宜寫蓬瀛合作圖 의사봉영합작도
有, 1479-1552)가 운문산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남명은 나물 먹는다고 싫어하지 말라고 하면서 청빈을 山捲晴雲新景出 산권청운신경출
김대유를 찾아가 ‘백성들 이 복이 없기 때문에 강조하였다. 담양에서는 식영정(息影亭)에 머물면서 江添客水舊聲孤 강첨객수구성고 김해일보
이같은 사람이 누런 패처럼 되었다’ 라고 하면서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과 함께 옛날
안타까 한다. 영천에서는 안증(安嶒, 1494-1553)의 산해정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떠올리고 백성들의
정자인 완구정 (玩龜亭)과 관성 건물인 채련당 (採 고통이 여전하니 경제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蓮當) 등 여러 승경지를 둘러본다. 지금의 도남동(道 우리는 여기서 국도순례의 과정에서도 끝임없이
南洞)에 소재한 완구정에서는 ‘동쪽 들판은 강가로 곤고한 민생을 걱정했던 남명의 생각을 읽게 된다. 서울 나들이/곽 구비(시인.수필)
뻗어 아득하고, 북쪽 산은 해 쪽으 로 달려가는
구나’ 라고 하면서 광대한 산하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새련당에서 는 ‘대보는 목련이요 강가에는 다음호계속>>>
옥같은 모래, 푸른 들 파란 안개는 모두 어때 한가’
라며 산하와 어우러져 있는 건물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명은 완 구정에서 운문산에 은거생활을 하고 김해일보
있었던 김대유의 지조를 그리위하며 만 길 운문산의
경복궁역에서 겨울에 만나는 어른들과 수도 있단 얘기다. 한꺼번에 알아먹기도 한꺼번에 어른하고만 하루 종일 있으면
문학을 얘기하는 일이 주어진다면 발걸음이 힘든 이런 사소한 말에도 뭐? 뭐라고? 어중간한 내 나이가 진이 빠진다는 것쯤은
새벽이어도 경쾌하다. 가슴속에 음표 몇 개
오르락내리락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은 옆 하시니 윤 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감수해야 하지만 뭐 찻집에서 본인 시를
사람들이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청운도서관 들어서면서 언제 기력이 나오신 읊고 서로 평을 하는 진지한 시간은
정수리가 빈 머리를 은폐시키느라 중절모 건지 내가 모르는 역사를 또 반짝반짝 꼭 거치기에 이 모임에 진짜 본질을 유지하는
젊잖게 쓰시고 뒷짐을 지고 먼저 와서 설명해 주신다. 걷기가 운동에 좋다는 것을 자존심이 보인다.
서성거린다. 84세의 회장님 저 멀리에서도 다행히 실천하셔서 두 시간씩 걷는 목표를 ‘나 겨울엔 추워서 성질이 많아요. 동안거에
어찌나 꼿꼿한 자세인지 책 많이 읽으셔서 꼭 지키시기에 젊은이들 못 지 않아 배울 들어 가유 담달부턴 안 나와 3월부터 합류
◆곽 구비 프로필◆
인자하게 나이 드셨다. 팔순이 넘은 원로 점이 많다. ‘사진 좀 찍자 구’ 존칭도 할라고 하니까 건강하셔야 해요?’ “3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시인들이 절반을 차지한 이 모임이 30년은 생략하고 내가 큰소리를 지르면 지나가는 월까진 살아 있어야 겄네”? 인제 우린 뭔
신정문학&문인협회 고문
넘었다. 이제 1년차인 내 나이 때 결성된 다른 사람들이 종종 쳐다보기도 한다. 재미로 살어? 기타 등등의 말씀으로
남명문학회 회원
모양이지만 모임에 유머 담당인 내가 아무튼 식당에 앉아 주문하려면 ‘내 아쉬워하신다. 인사 동 쪽으로 건너와 곱창에
하운문학&작가협회 회원
목소리를 충분히 내도록 진짜로 자애로운 목소리가 안 나와 목 쉬었어’ 하면 “그러게 막걸리 두 사발 마시고 막차를 탔더니 동창이
한국스토리문인협회 정회원
마음을 쓰신다. 긴 세월을 오는 사이 사선 왜 소리는 질러대 다 들려” 하시며 생뚱한 밝아졌어도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으니
제9회 강원경제신문 누리달 공모전 대상 수상
곡선의 빗금을 무자비하게 칠해 버려서 표정이 재밌기도 하다. 아이들이 천진하다가 좋은 징조다. 문학이 주는 삶의 쾌감이기도
저서 시집: 1집 푸른 들판은 아버지다.
웃는지 찡그린 지 별반 차이 없어도 신경 치열하게 살아내고 나면 다시 아주 어른이 하다. 불특정 대중에 글 한 줄이 삶을 잘
2집 사막을 연주하다
안 쓰고 재밌게 까부는 게 내 일이다. 아니 되어 아이처럼 천진해지는 시기가 바로 꾸려 갈 계기가 되어 모두가 행복할 수
3집 가시 박힌 날
할 얘기를 큰 소리 질러야 그 중 몇 분은 팔순에 가까운 나이 아닐까! 나는 이런 날 있다면 그 얼마나 보람될까 하여 가슴 가득
4집 자연의 들러리로 살고 싶다 외 다수
알아들으시니 어쩔 땐 말 하고 나서도 내 뜨거운 순수를 읽어버리기에 기쁨이 차오른다. 삶이란 사소한 데서 큰
힘이 많이 축 난다. 뭉클하고 좋다. 희망이 다가온다.
“이럴 땐 눈이 왔으면 딱 좋은 날이여” 밥값 찻값은 항상 각자 계산하기에 이
이 좋은 한마디 했다간 자칫 시끄러워 질 모임이 오래 간다며 아주 건전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