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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9월 9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연자루(燕子樓)주 열朱悅
燕子樓亡問幾春 연자루망문기춘
碧紗珠玉已成塵 벽사주옥이성진
虎溪鳴咽何時盡 호계명인하시진
이어서>>> (婦寺:王后이하 왕 주위의 여자들과 宦官)가 나라를 雲山千年不見人 운산천년불견인
전횡한 것은 혹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서리가 나라
를 전횡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치권력이 대 연자루 없어진 지 몇 해이던가
비단주렴 옥구슬은 티끌이 되었네.
심지어 각 고을을 갈라 놓고 문권(文券 토지권리를 부(大夫)에게 있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 호계천 물 울어 울어 언제 다하리
양도하는 증권)을 만들어서 그 자손(子孫)들에게 전 의 손에서입니까?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조
합니다. 각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모두 방해하니 종(祖宗) 200년의 유업(遺業)을 기록하면서도, 많은
하나의 공물도 납부할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공물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앞뒤 서로 모두 정치를 서리 구름 홈어지듯 오랜 세월에, 옛 님은 보이지 않네.
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구족(九族)가업을 다 팔아서 에게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런 일은 차마 소 귀에 작가 주 열은 ? ~1287년의 인물로 고려의 문신이다. 고
가도 관사(官司)에는 바치지도 못하고 여러 사사로 도 들려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망탁(卓;中國 前漢末 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쳤고 원종 때는 충
운 집에갖다 바치고 있으며, 원래 바치는 공물의 백 의 王孝과 後漢末의 董卓을 말함)의 간교함에도 이 청, 전라, 경상 3도의 안렴사를 역임해 백성들이 경외하
배(百倍)가 안되면 받지조차 않으니 공물을 계속해 런 일은 없었으며 망한 나라의 세상에도 이러한 일은 였다. 충렬왕은 특히 주
서 바칠 수가 없읍니다.그러니 도망하는 사람이 계속 없었습니다. 열을 중용해 여러 높은 벼슬을 지냈다. 당대 최고의 문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찌 역대 조종(祖宗)의 고을 여기서 남명은 조선중기 나라의 정치가 바로 이 조 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활달한 성품에 모든 일 연자루(燕子樓) - 정몽주鄭夢周
에서 민중이 바치는 공물을갑자기 날다람쥐나 쥐새끼 세정책의 잘못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 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했다.
같은 무리들이 나눠먹는 바가 되었습니까? 이 어찌 다.그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공물의 방납과 이를 訪古伽倻草色春 방고가야초색춘
임금은 나라를 독차지하는 부(富)를 누리면서도 이 관장하는 서리의 작폐 때문이라 하고 있다. 작가가 언제 금주에 와서 연자루를 찾아 시를 썼는지 興亡幾變海爲塵 흥망기변해위진
종(僕돼서리)들의 방납(防納) 물건에서 자금을 구하 맹자도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알 수 없지만,글자 뜻으로만 옮긴 위의 시는 다시 해석 當時斷腸留詩客 당시단장유시객
려 합니까?" 라고 상소하였다. 하였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연자루 없어 진지 몇 해이던가"라는 自是心淸如水人 자시심청여수인
중국이나 한국의 각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말기에 가 가르쳐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의 기틀인 민중 구절에서는 단순히 허물어진 누각이 아니라 "가야가 없
면서 왕실과 귀족의 부패타락과 사치향략 그리고 혹은 이 공물과 서리의 가렴주구에 생존마저 위태로워 살 어진 오랜 세월"이 느껴지고, "비단주렴 옥구슬은 티끌 燕子樓前燕子廻 연자루전연자회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이 파탄되고 이를 조달 아나려고 유민화하고 도적이 되어 도덕을 버릴 수 밖 이 되었네," 역시 "신비로운 가야문화가 흩어져 버린” 郎君一去不重來 낭군일거불중래
하기 위해 세금을 과다하게 민중에게서 착취하자 민 에 없는 마당에, 임금의 구언에 이기심성과 윤 안타까움울 담고 있다. 當時手種悔花樹 당시수종매화수
심(民意)이 이탈되고 민중이 봉기하는 것이 직접 원 리도덕, 그리고 이단 배척으로 답한다는 것은 오히려 爲問東風幾度開 위문동풍기도개
인이다. 프랑스 혁명도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공맹(孔孟)의 정치사상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권을 작가는 연자루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이렇게 볼 때 남명의 경세사상(經世思想)에서 공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남기고 신라에 병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야를 회
폐해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는 것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남명은 이어서 "서리들이 도적이 되어 모든 관청에 상한 것은 아닐까,
공리(公利) 사상에 바탕을 두었기에 더욱 절실한 것 무리를 이루어 들어가 웅거하여 요직을 차지하고서 옛 가야 찾아오니 풀빛은 봄이라
이었고 후세 실학자들의 시의구폐(時宜求弊)적인 경세 나라의 국맥(脈)을 결단 낼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 연자루(燕子樓) - 김득배金得培 흥망의 세월 바다가 땅이 되었구나.
사상, 즉 실학사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하겠다. 에게 제사 지내는 희생까지 도적질하여도 법관이 감 그 때의 애끓는 슬픔으로 머물렀던 시객(時客)은
그리고 남명의 '서리망국론'은 당시 국가의 실질적인 히 묻지를 못하고 사구(司憲형조)도 이를 따지지 않 來管盆城二十春 내관분성이십춘 스스로 마음 맑기가 물 같은 사람이었다.
폐해를 적시한 것이다. 습니다. 혹 일개 사원(司員하급의 젊은 관리)을 조금 當時父老半爲塵 당시부로반위진
‘서리’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아 규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 自從書記爲元帥 자종서기위원수 연자루 앞 제비는 돌아오는데
전' 또는 '구실아치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양한(兩 아귀에 달려 있고 관리들의 무리들은 손을 묶어 놓 屈指如今有幾人 굴지여금유기인 한번간 낭군은 다시 오지 않네.
漢)시대에는 기관의 장 만을 '관(官)이라 하고 관에 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근근히 녹봉이나 받아 먹으면 분성에 관리로 온 지 20년 당시 손수 심었던 매화나무여
속한 자는 모두 '이(吏)'라 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서 아첨하며 따르는 지경이니 이것이 어찌 믿는 바가 당시 어른 절반은 세상 떠났네. 작 묻노니, 봄바람에 몇 번이나 피었던가. 가
관과 이가 별로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원(元)나라 없고서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라고 하여, 그는 서리 나는 서기에서 원수(元帥)가 되었으니 정 몽
이후에 관과 이가 점차 구분되기 시작하여 명과 청시 가 도적이 되어 무리를 이루어 나라를 결단 내고 사 손가락 꼽아 몇 사람이나 되라 주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다. 고려 말기
대에 와서는 확연히 구분되어 출신을 제한하게 되자, 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단호하게 지적하였 1337~1392년의 인물로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름을
'이'는 실무를 전담하면서 악폐를 저질렀다. 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 서리들을 규찰하고 심문 떨쳤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일편단심은 이방원(李芳
조선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서리가 사대부 계층과 신 하여 죄를 논하고 예방해야 할 사헌부나 형조 등 조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스물 세 번째 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
분적으로도 확연히 구분 되어 버렸고, 고려의 전시과 정의 대신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가렴주구하는 훗날의 태종) 일파에게 선숙교에서 암살되었다. 55년
(田柴科)에서는 잡리(雜吏)도 전시(田朱)의 지급 대 것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세 굴을 들락거리는 교활한 작가 김득배는 1312~1362년의 고려 후기 문신이다. 문 일생은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호쾌하였고, 지극
상이었으나 조선의 과전법(科田法)에서는 이들이 제 토끼와 보호막으로서 딱딱한 껍질을 지닌 냇가의 조 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홍건적을 평정해 공신이 한 충효에 문장도 뛰어났다. 작가가 김해에 와서 연자
외되어 버렸다. 서리들의 탐학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개로 대신들이 감싸고 도는 당시의 서리들을 비유하 되고, 1360년 10월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의 관리관) 루를 찾아 옛 가야의 흥망을 시로 노래하고 경상도 안
수 밖에 없는 제도가 생겨난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면서 도탄에 따지게 된 현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가 되어 정몽주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권력다툼으로 찰사로 김해에 와서 연자루 앞 매화를 손수 심었던 문
이들이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특히 공물(貢物)문제 1362년 효수(梟首)되었는데 정몽주가 공민왕에게 청하 인 이 첨(李詹, 1345~1405)까지 추억했음은 연자루를
에 있어 제도적 모순,앞서 살펴본 대납(代納)과 방납 여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제문을 지어 억울한 더욱 그립게 한다.
의 작폐가 가능하게 된다. 죽음을 애도했다. 1392년(공양왕 4년) 누명을 벗었다.
이에 서리는 중앙, 지방할 것 없이 관료들과 결탁하 다음호계속>>>
여 민중을 수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공물을 낼 수 작가가 벼슬을 하면서 젊었을 때 서기(書記)의 직책으
가 없어 민중들은 유민화하고 도적이 되고 반란 다음호계속>>> 로 김해에 왔다가 20년이 지나 원수(元帥)가 되어 다
을 일으키기까지 하여, 16세기에는 사회적 모순의 심 시 와서 옛날의 노인들을 생각하며 지은 시로, 따뜻한
화와 불안이 절정에 이른다. 심성이 잘 드러난다. 「동문선」에는 '김해 객사'로 실 김해일보
남명은 선조가 즉위하여 벼슬로 부르자, 이 때 무진 려 있다. 「동문선」은 조선 성종 9년(1478) 당시 대제
봉사(戊辰封事)〉를 올렸다. 김해일보 학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우리 나라 역대 시문집
옛날부터 권신(權臣)이나 척리(成里), 그리고 부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