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김해일보167호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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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연자루(燕子樓) - 이 행李荇


                                                                                                                              行到盆城又一春 행도분성우일춘
                                                                                                                              家家脩竹淨無盡 가가수죽정무진
                                                                                                                              題詩爲問招仙客 제시위문초선객
            이어서>>>                                            어났지만 아버지가 문과에 급체함에 따라 서울(5세                                     羽扇輪巾幾個人 우선륜건기개인

                                                              경)로 올라간다. 함경도 단천군수로 아버지가 외임을                              나그네로 분성에 와서 또 한 번 봄을 맞는데
                                                              맡자  따라  갔다가  서울(18세)로  다시  돌아온다.  아                          집집마다 대나무처럼 티 없이 깨끗하다.
                                                              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  삼가(26세)로  돌아와  장사                           시를 지어 묻노니 신선을 찾는 나그네여
                                                              지내고 만 4년을 살다가 처향인 김해(30세)로 이주                             깃 부채에 윤건(輪巾) 쓴 이 몇이나 되던가?
            실학자들은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고  시폐는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가(45세)의 선영에 장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보는 일종                      사지내고  거기서  생활한다.  그리고  61세  되던  해에                    작가 이 행(1478~153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의 변법사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제도 및                      는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이사해서 세상을 마치게 된                          용재(容齋, 1495년(연산군 1년)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연자루(燕子樓) - 김 감金勘
            국방책에서도 정전론(井田論)에서 출발한 균전론적인                       다. 이처림 남명은 삼가 → 서울 → 단천 → 서울 →                        하여 성문원 전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
            '한전론',  '여전론과  병동(兵農)  일치적인  '부병제(府               삼가 → 김해 → 삼가 → 덕산으로 아버지의 직장을                          문관 응교 시절 연산군 생모 페비 윤씨 복위 반대로 유                                圓喬方壺何處尋 원교방호하처심
            兵制)'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송(宋)나라를  모방                따라,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외향이나 처향으로 자주                          배,  충주를  시작으로  함양에서  1506년  거제로  안치되
            한  조선조의  문치주의는  문약(文)을  초래하여  변방                  옮겨 다니게 된다.                                            었는데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여러 직을 거쳐                                 直百乘興此登臨 직수승흥자등임
            오랑캐의 외침에 속수무책인 점을 주목하여, 국가에                       마지막에는  자신의  뜻을  후세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1527년 우의정,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동국여지승
            서 문무의 비중을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남                      지리산하의 덕산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과 강학에 몰                           람」 편찬 후 좌의 정에 올랐다가 김안로 일파에게 밀                                 佳人自古而生老 가인자고이생노
            명을 비롯한 남명학과 및 이익과 정약용이 일치하고                       두한다. 다음 자료를 보자.                                       려 평안도 유배 중 죽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글씨와 그
            있고 그 논조도 매우 유사하다. 그것은 남명이 박학                                                                            림에도 능하였다.                                                      燕子爲留至今 연자위수유지금
            하여  병진(兵庫)에  까지  미치고  제자들에게  대책문                  남의 집에 살다 보니 날마다 불편한 일이 생기어, 선
            을 출제하며, 그 결과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로서 봉                     친께서 계시던 옛터로 돌아가 뜻을 같이 하는 향리의
            기한 의병이 연전연승한 데에서도 증명이 되고있다                        벗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생각입니다...지금부터는 하                                    연자루(燕子樓)- 맹사성孟思誠                                   廢墓荒臺秋最早 폐묘황대추최조
            또한  선진(先秦)시대  사(士)와  벼슬살이로서  출사                   루의 일과가 나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다
            (出仕)란 그 어원이 단순한 글을 하는 선비나 문관                      만 몸을 의지할 계책이 없어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할                                    駕洛遺虛幾見春 가락유허기견춘                                      幽花苦行畵陰 유화고행화편음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끼를  지닌  무사(武士)나                 까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무관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남명의 학문사                                                                                      首王文物亦隨塵 수왕문물역수진                                      輕風把手殘酒 경풍파수음잔주
            상이  송명(宋明)의  성리학적인  것과  포괄하여  근원                  위의  글은  김해에서  노흠(盧欽,  1527-1602)에게  보
            적인 데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의 경세치용적 실학사                       낸 편지의 일부이다. 남명은 여기서 남의 집에 살기                                    可憐燕子如懷古 가련연자여회고                                     急管哀絲雜知吟 급관애사잡단음
            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익은 그                      때문에 불편한 일이 많이 생겨 고향인 삼가로 옮겨가
            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퇴계의  글은  본래                   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벗들과 함께 학문                                    來訪高樓喚主人 내방고루환주인
            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政                 을 강마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몸을 의탁                                                                                          원교방호를 어디서 찾을까
            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 법령이 해이해지                      할 곳 또한 마땅하지 않았으니 그것 또한 제대로 될                                                                                   망설임 없이 흥을 따라 이 다락에 올랐네.
            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이기                      것 같지 않아 자신이 생각했던 진실된 공부를 이루지                                  가락국 옛 터는 봄을 몇 번 맞았던고                                  미인은 예로부터 늙기가 빠른데,
            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時務)의 큰 것을 대략 말                      못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남명은 이처럼 아버지의                                 수로왕 문물도 세월 따라 티끌이 되었네.                                    연자루 뉘를 위해 남았는가.
            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전근이나 경제적 이유로 하여 자주 거주지를 옮겨 다                                    가련한 제비도 옛날이 그리운지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남명의 학문 경향성                      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폭넓은 체험을 할 수                                 높은 누각 찾아와 주인을 부르는구나.                              황폐한 무덤 거친 대에 가을이 먼저 오고
            과 좋은 대비를 한 논평이었다.
                                                              있었다.  민중의  생활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                                                                               그윽한 꽃과 참대 그림같이 그늘 지운다.
                                                              으며, 국토산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                                                                                    살랑대는 바람에 이끌려 남은 술잔 기울
                                                              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혹은 내륙에서 해안까지 거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물 네 번째                                  빠른 피리 애절한 가야금에 단가를 읊는다
            5. 국토 사랑 정신                                       주지를 이동 하면서 남명은 그의 사유 속에 국토 사
                                                                                                                               작가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조선 세종 20년       작가 김 감은 세조12년(1446)~중종4년(1509)의 인물
                                                              랑과 함께 현실과 밀착된 사유를 키위왔던 것이다.
            1) 유기체적 국토인식                                                                                            (1438)의 인물로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1386                  로 조선 중기의 정치가였다. 1489년(성종20)에 식년 문
                                                                                                                    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우의                      과 을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고, 연사군에 충성
            남명의  국토산하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과  결부되                                                                        정 재임시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과정에 감관                        을 서약하는 경서문을 찬진하였다. 폭군 연산군의 폐비
            어 있으니 필연적이라 하겠다. 그의 삶에 대한 특징                                                                            사로 감수를 맡았다. 세종 임금이 실록을 한 번 보자                      윤씨 복위에 반대하여 유배 생활 한 이 행이 있다면 연
            을 조사해 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남명                                                                            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                      산군 폭정에 아부한 김 감이 있음을 어찌 이해할 것인
            의 삶에 대한 특징으로 우리는 빈번한 거주지 이동과                                         다음호계속>>>                           를 본받게 되어 사관은 두려워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가, 사치와 향락으로 폭군이 된 연산의 흥청망청 노래
            불우한 삶, 가정 안국으로 관련된 사화를 들 수 있                                                                            것”이라고 거부해 세종도 이를 따랐다고 한다. 1432년                    의 금표(禁)로 한양을 쫓겨난 한양백성의 통곡소리가
            다. 이는 그의 정신과 행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좌의정에 올랐다가 1435년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고 물                     연자루의 시를 더욱 외롭게 한다.
            다. 즉 처음의 것은 국토산하 곳곳을 살펴 민중의 삶                                                                           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자들에 응하였                      판충주부사,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중종반정에 협
            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두 번째의 것은                                                      김해일보                 다. 악기를 즐기는 어질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비록 벼                      력하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창부원군에 봉해졌
            관념적 유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단검시키                                                                             슬이 낮은 사람이 집에 와도 나가서 배웅하고 손님이                       지만 줄곧 연산군 때의 충신이었던 이유로 사림의 지탄
            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것은 모순된                                                                            말에 오른 뒤에야 들어갔다고 전한다. 소(牛) 타기
            현실을 직시하면서 불출사(不出仕)의 의지를 강하게                                                                             를 즐겨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훌륭                     을 받았다.
            구축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국토산하에 대한 인                                                                            한 인물이 김해부를 찾아 연자루에서 가야를 회상하며
            식이 그의 빈번한 거주지 이동과 밀착되어 있으니 여                                                                            쓴 빼어난 작품이다.                                                               다음호계속>>>
            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남명은 합천 삼가에서 태

                                                                                                                                                                                                           김해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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