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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12월 9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이어서>>>                                             하였으니 선생은 절의(節義)를 승상하는 선비였다.
                                                                                                                                                                       문득 덕이 온전한 대현(大賢)에 비길 수는 없으나 산이
                                                                                                                                                                       푸르고  물이  우렁차서  오히려  만족이  일사부정(一絲
                                                                                                                                                                       扶鼎)의 형상이라, 하물며 선생의 도의와 짝한 명분과
            이어서>>>                                            올바른 관계가 아니거나 사람의 노리나 윤리가 없다                                                                              절개가 일시에 지려(孤鴻, 부지런히 힘씀)하여 백세(百
                                                              면 이미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유학은 바로
                                                                                                                                                                       世)로 심어졌으니 이 어찌 산과 바다가 땅에 나아가 사
                                                              올바른  인간과  그  인간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는  훌                           산해정山海亭과 신산서원新山書院                            람을 생각하는 자료가 아니리오?
                                                              륭한 학문이다. 그렇다면 지난날 우리 선조들의 대표                                                                             내 비록 이 정자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일찍이 칠점산에
            제4장                                               적 사상이었던 유학을 연구하여 장점은 배우고 단점                           산해정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학문을 강설(講說)                     서 비를 빌었으니 산은 곧 정자 남쪽 10리로 정자의 안
            남명학의 한국유학사적 위치                                    은 버림으로서 민족사상의 새로운 지표를 정립해 나                           하던 곳이다.                                            계(限界,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되는 곳이다.
                                                              갈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평생을 공부와 후학 양성에 바친                      바다에 이르러 만연히 평평하게 퍼졌으며 칠점산이 북
            1, 유학과 성리학, 그리고 전통사상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비파형                           인물로  경인년(庚寅年)  중종(中宗)  25년인  1530년에                두(北斗)처럼 벌려 이어졌고 서남(西南)의 대해(大海)
                                                              동검과 지석묘의 분포 지역인 중국의 북부 황하 중·                          30세의 나이로 김해에 왔으니, 그곳이 남명의 처가 마                     가 하늘에 연(連)하여 낙동강이 근해에서 투타(透, 어
            유학(儒學)이라 할 때 '유(儒)'자는 사람 인(人) 변에  하류와  산동반도를  포함하여  만주  동북삼성  지역과                                       을인 지금의 김해시 대동면 주중마을이다.                             정거림)하며 삼차수(三水) 갈라져 지경을 달리니 매우
            쓸 수(需)자를 써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학문'                    한반도에 분포하여 살았다고 추정한다. 당시 동북아의                          이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도(道)를  행하고  후학                 기이하고 장한 모습이다. 정자에 올라 남으로 바라본다
            을 말한다. 또한 사람에게 부드럽게 젖어들어 간다는  주인은 동이(東夷)족으로서 우리의 고조선족이다. 동                                              을 가르치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다 48세 때 합천 삼                     면 마땅히 경치가 더욱 좋으리라.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  범위와  내용이  문학,  사학,  이족이 세운 은나라의 유적인 은허에서 한자(漢字의)                                      가를 거쳐 1561년에 61세에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 갔                    선생이 살던 곳으로 사람들이 지나간 바를 생각하게 하
            철학, 정치, 경제, 법률, 도덕, 종교, 예의, 음악 등 매                시작인 갑골문의 발견이나, 산동반도 근처 무씨사(武                          으며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니 땅도 이름이 있는데 하물며 삼강(三綱)의 발자취를
            우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유학은 인류가 살                      氏祠)에서단군신화와 꼭 같은 내용의 비석그림이 발                           산해정은  순조(純祖)  23년(1823)에  중건하였고  해방                남긴  곳이요  또한  산과  바다의  경치를  더함에  있어서
            기  시작한  이래  꾸준히  축적해  온  지혜의  총화로서  견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나라                                        후에 다시 중수한 건물이 지금의 건물이며 문화재 자료                      랴.
            인간세상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총체적인  학문이며,  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나서 송나라가 되는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자가 이루어지고 헐어진 일에는 이야기를 더하고 줄
            인간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준칙들이 담겨있다.                        데, 공자의 조상이 송나라에서 노나라로 망명하였다는                          습지는  “산해정(山海亭)은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을                  일 수 없다. 그러나 선생에 있어서는 한 때의 이목(耳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 혹은 리기심성                       고사를 살펴볼 때 과연 한자와 공자 유학사상의 원류                          강설하던 곳인데 2백여 년 후 고을 선비 송윤증(宋允                      日)이 거듭 새로워 지고 다만 사림의 첨앙(膽仰, 우러
            지학(理氣心性之學)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가 중국 것만이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                                                   增), 류방식(柳邦人)이 중건했다.”고 적고 정언(正言)                    러봄)에  관계되면  반드시  이부사(李府使)처럼  도우지
            공자와 맹자에 의하여 정리된 원시유학이 보다.                         아무튼 유학은 한문의 전래와 동시에 우리 나라에 들                          김유헌(金裕憲)의 기(記)를 싣고 있다.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부사는 먼저 할 일을 알았으
            현실적인 인간과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를 담고 있는                       어오기  시작했으니  그  시기는  기자조선  때부터  한                      신산서원(新山書院)은 남명이 처가의 뒷산 신산(山)의                      며 두 선비의 경영과 협찬에 조군이 사적(事蹟)을 표양
            데 비해,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 와서 이전의 불교                     (漢)나라에 걸쳐 오랜 기간 서서히 유래되었다. 삼국                         경승(景勝)을 사랑해 이곳에 와서 산해정을 짓고 강도                      (表場)함은 가히 선생의 충신이라 할 만하여 함께 쓸만
            와 도교의 형이상학적인 것이 새롭게 가미된 학문으                       시대에 민본적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을 구휼(救                           하였음을 기려 1588년 향인들의 청에 의하여 김해부사                     한 것이다.
            로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이  이를  형성하고  恤)하고 임금 앞에서 충성된 간언을 하는 신하를 뽑                                         (金海府使) 양사준(梁思俊)이 정자(亭子)의 동쪽에 서                     내 말학이지만 다행히 이웃 지경의 수령이 되었고 선생
            집대성하였다. 원나라 시대에 국가의 정치철학에 활용                      아 재상에 임명한다든지, 통일 신라시대 (남북국                            원(書院)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중                    께서 대현에 더욱 방불(佛, 거의 비슷함)하심을 들었으
            되고 우리 나라에는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조에 와                       시대)에 정전(田)을 지급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다                         단되었다.                                              니 어찌 참람하다 하여 굳이 사양하리오? 이로서 기문
            서 꽃을 피웠다. 조선조 500여 년간의 성리학은 국가                    시  말해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도  사회,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인  1609년에  안  희(安臺)                (記文)을 삼는다.”
            철학과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왕도정치의 기본이념이자  정치, 경제, 윤리도덕과 인간의 삶에 유학사상이 뿌리                                               허경윤(許景胤) 등의 힘으로 준공하여 신산서원이라 사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도덕률로서 조선조 사상사의 대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강수, 설총, 최치                        액(賜額, 임금이 내린 이름) 받았다. 남명 조 식과 신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서른 번째
            부분을 차지하였다.                                        원 등 훌륭한 유학자- 국 그 밖에 이학를 배출하고                          계성(申李誠)을  향사하다가  고종  8년(1871)  3월에  훼
            그러나 근대 이후 '유학'이라 하면 우리의 전통사상과  독서삼품과를 통하여 유교경전을 폭넓게 공부하여 정                                              철되었다.                                              조선의  대표적  산림학자로  그  구심점  역할을  한  남명
            문화를  서양과  일본의  영향으로  오늘날까지도  근대  치와  사회제도를  정비하였다.  고려에  들어와  유학을                                       『읍지』에는 신산서원을 “부의 북쪽 20리 주부동(酒                      조식 선생께서 산림학자로서의 기풍을 더욱 다지고 후
            자본주의화(서구화)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서  망국의  중심으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해동  공자'라  칭하는                                       府洞) 신어산(神魚山) 아래에 있다. 남명 조 식, 송계                    학을 양성한 산해정을 중수한 김해부사 이석하와 선비
            한 원인으로 치부할 정도로 매도해 왔다. 그러나 최                      최충(崔沖984-1068)의 유학사상은 이미 성리학적 요                       신계성을 아울러 배향한다. 만력 기유년(己西年 1609)                    송윤증,  류방식,  조석권님을  생각한다.  선대의  거룩한
            근 '유교자본주의'나 '유교사회주의'라는 학술용어가 등                    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으로 유학이 피                          에 신산서원 액호가 조정에서 내렸다.”고 적고,참지(參                     업적을 돌아볼 수 있음은 선대의 걸음걸음이 위대했기
            장하고, 이전과 다르게 재조명되면서 그 문화와 사상                      폐되었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안향(安:1243-1306)이                    知) 배대유(裵大維)의 기(記)를 싣고 있다.                          때문일이다. 산림학자(山林學者)란 이름은 조선의 임금
            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18세                     원나라로부터 새로운 유학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도입                           산해정(山海亭)과  신산서원(新山書院)의  기(記)와  시                   으로 그 책임을 못다한 연산군(燕山君) 이후에 더욱 빛
            기 이전까지 많은 분야에서 서양을 앞섰고, 최근 유                      하여 그 제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성                          (詩)에서  산해정(山海亭)은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이 났을 것이다.
            교문화권  (한자문화권)의  급속한  사회경제적  발전은  균관에서 성리학에 대한교육이 실시되고, 정치에서도                                            정자인지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인지,  조선  중기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는 과거를 보지 않는 선비다. 시
            유교문화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민본적인  내치(內治)와  의리학의  외교정치가  퍼지기                                       최고 학자의 길은 왜 벼슬이 아니었는지, 왜 사람이었                      름에 묻혀 공부하는 선비를 산림학자라 부르지만 그들
            그리고 최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단순히 서양화                       시작하였다.                                                는지 다시 돌아보며 이 시대가 잃어버린 우리와 김해의                      의 당시 삶을 우리 21세기에 제대로 상상이나 해 볼 수
            나 미국화가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본명이  주희(朱                        참 사랑을 찾아본다.                                        있을까. 참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외로웠을 것이
            이다'는 말처럼 우리의 전통사상과 문화를 재조명하는  熹:1130-1200),  호는  회암(晦庵)이다.  그는  앞  시대                                                                                      다. 2백 수십 년이 지났지만 산해정(山海亭)을 중수한
            데서부터올바른 세계화가 가능하다. 이것은 국수주의                       인 북송 때 다섯 선생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                           산해정기(山海亭記) - 김유헌金裕憲                           네 분께존경과 사랑을 올린다.
            와는 다르게 우리의 주체적인 화의식이 성립되고 형                       이)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을 주                                                                             이석하(李錫夏)  부사는  문과  출신으로  1816년  6월에
            성되어야 올바른 문화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학'이라고도 일컫는다.                                         산해정은  문정공(文貞公,  남명  선생의  시호)  남명(南                 도임하여 1818년 3월에 사직으로 교체되었다고 습지가
            기계문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정치제도도 그 속에 철                      이  학문은  사람의  성품과  우주의  이치를  주요  내용                    冥)  선생이  머물던  곳이다.  선생께서  도덕과  경술(經                전하고 있다.
            학사상과 원리원칙이 없고 인간의 기본적 윤리도덕성                       으로  하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하고,  정                     術)을 겸하여 우뚝하게 멀리 미치는 지절(志節)을 세우                     류방식(柳邦植)은 1778~1835년의 선비로서 가례(家禮)
            이  결여되어  있다면  인간사회에서부터  자연과의  올                   자와 주자가 성립시켰으므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산림(山林)으로                      를  질의(質疑)하고  『북정기(北征記)』  『추모록(追崇
            바른 관계가 와해되고 말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                      하며,  도리를  강조한다고  하여  도학(道學)이라고도                       강학하다 중년에 김해 신산의 승경(勝景)을 찾아 산을                      錄)을 주석(註釋)하였다.
            는 사회의 제반 병리 현상들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                      부르며, 그 밖에 이학(理學), 의리학(義理學), 성명학                       베게 삼고 띠풀집을 지어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며 ‘山                      송윤증(1759~1846)은  청주  송씨  후예로,  몸과  마음가
            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공직자의 부정부패에서부                      (性命學), 신유학(新儒學)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海'라 현판 걸고 한가롭게 학식을 넓히며 심성을 닦기                      짐이  엄중하고  아우  만증(萬增)과  함께  문행(文行)이
            터 일반 서민과 청소년들의 윤리도덕의 붕괴는 말할  성리학의  중심내용은  대개  태극론(太極論),  이기론                                            를 30여 년이라, 선생께서 몰()한 즉 그 정자 곁에서                    있어 고을 유림이 추중(推重)했다. 조석권 선비에 대한
            것도 없이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전통문화와  (理氣論),  심성론(心性論),  성경론(誠敬命)의  네  가                                        제사를 드리니 후생 말학(未學)이 선생의 풍교에 방황                      기록은 찾지 못했다.
            사상을 무시하고 제대로 된 도덕교육을 시키지 않은  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네 가지에는 공통적으로 인                                               하는 자는 지금도 산해정을 칭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정                       남명 선생께서는 공부를, 학문을, 벼슬 아닌 사람을 위
            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간의 마음 문제, 즉 마음의 정체와 본질을 파악한 후                         자가 불타고 허물어 졌으나 다시 세우지 못했다.                         해서 했다. 시험으로, 선거로, 처세술로 출세의 길을 걷
            계절의 변화를 몰라 춥거나 더운 줄도 모르는 '철부                      그 마음을 어떻게 올고려는 80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                         230여  년이  지나  김해부사(府使)  이석하(李錫夏,                   고 걸으면서도 국민과 시민을위한 길이라고 포장한 어
            지'에서부터 제대로 된 인간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대                     를 받아온 처지라 자연히 원나라의 과거제 ,험(제과)                         1816~1818재임)가  산장(山長,  신산서원장)으로서  감개               제와 오늘을 돌아본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부분 지식교육과 외국어 교육을 시키면서 시기를 놓                       에 응시케 하였는데 과거시험 때마다 1~2명의 합격자                         하여 산해정을 경영(經營, 중수)하니 선비 송윤증(宋允
            쳐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아이는  제멋대로  를 내었다고《고려사》는 적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增)이  재물을  모으고  류방식  (柳邦植)이  찬동하며  열
            자라  부모  말을  따르지  않게  되고  나아가서  경찰에  도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는 고려의 바르게 쓸 것인가                                         심히 하여 다음 해에 정자가 이루어졌다. 이 해에 나는
            선생을 고발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법과 제도를 우습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양산군수가 되었는데 김해에서 서원(新山)의 선비 조석
            게 보고 급기야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권(曺錫權)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상량문을 산장에게                                   다음호계속>>>
            앞으로 그 이떤 세상이 온다 할지라도 사회가 사람이                                                                            청하였으나 어찌 기문을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
            모여 사는 공동체의 모듬살이의 사회라면 사람과 사                                         다음호계속>>>                            였다.                                                                                    김해일보
            람사이에 지켜야 할 본분과 기본질서가 있어야 한다.                                                                            내  분수를  알아  사양하였으나  권고를  물리칠  수  없어
            그것이 바로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인(仁)의 사상으                                                                            말하기를“옛날  범문정공(范文正公,  범희문)이  엄선생
            로서, '어질다'라고는 것은 '두 사람(仁=人+人)', 즉 사                                                                      사당기(嚴先生祠堂記, 엄자릉)를 지었는데 말하기를 그
            람과  사람사이에서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말함이다.  '                                                   김해일보                선생의 풍교(風敎)는군자의 덕이 후세에 길이 전함이라
            인간(人間)'이란 뜻도 '사람과 사람 사이'로서 그것이


          2020  지역문화전문인력  양성사업                                                김해문화재단은  지역문            양성과정의  마무리단계에는  교육생들의  기획안
                                                                              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PT발표(1차 심의)를 통해 권역별 우수교육생을
          우수교육생  심의  2개  부문  수상                                               ‘지역문화전문인력  양            선정하게  되는데,  이들은  최종(2차  심의)PT발
                                                                              성사업’을  경남문화예
                                                                                                      표의 기회를 가졌다. 지난 11월 17일에 이루어진
          전국13개  문화재단에서  양성된  258명의  기획자,                                     술진흥원과  컨소시엄으            경남권 교육생 1차 심의에는 경남권역 교육생 35
                                                                              로  공동주관해오고  있
                                                                                                      명이 참여하였고, 경남문화예술진흥원에서 양성된
          심의를  거쳐  우수기획  선정  김해문화재단  교육                                       다. 본 사업은 7개 권역          교육생 2명과 김해문화재단 교육생 4명이 출석점
          생,  장관상  수상에  이어  심사의원    특별상                                       (강원,  경기,  경남,  세       수를  반영한  고득점  순으로  선정되었다.  선정된
                                                                              종, 울산, 전북, 제주)의  우수교육생들은 11월 26일 전국 권역에서 선정된
          까지  획득하여  최고득점  2관왕  수상  쾌거                                         13개 지역 문화재단에서  27인과 더불어 최종심의를 받았다.
                                                                              지역맞춤형  프로그램을  최종심의 결과는 기존의 계획대로 7개 권역이 득
          김해문화재단이  주관한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                  설계하여 제공하며 지역의 전문 문화기획자 양성                     점  순으로  각  하나씩의  상을  수상하였고,  심의
          성사업’수료  교육생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을 목표로 6년째 이어오고 있다.                            현장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사업 기획안 최종 PT발표에서 최고득점을 기록                     본 사업에서 배출되는 수료교육생은 올해 총 258                   김해문화재단에서  양성된  교육생이  최고상인  문
          해 영예의 문체부 장관상을 받았다. 또 다른 교                    명으로써,  경남권역은  35명을  양성하였고  이  중  체부 장관상과 함께 심사위원 특별상까지 총 2개
          육생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                     김해문화재단에서  양성된  교육생  수료인원은  19                 의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안았다.  김해문화재단
          다. 이로써 김해문화재단은 올해 2인의 수상자를                    명이다.                                          의 최고득점 기록은 작년도 수상(2019년 지역문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올해 김해문화재단에서 설계한 교육과정은 5월부                     화전문인력양성과정 문체부장관상 수상자 김해문
          최근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사업’을  김해문                  터 12월까지 약 8개월가량 진행하였으며 상반기                    화재단 양성교육생 김경남)에 이어 올해에도 이
          화재단  등과  공동으로  주관해온  지역문화진흥원                  에는 기획서 작성요령, 회계지식, 지역예술 생태                    어져,  주관기관과  평가위원들의  많은  호평을  받
          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258명의 전국 수료교육                   계 등 분야별 전문가들의 강의를 통한 이론교육                     았다.
          생  중에서  김해문화재단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과  현장실습이  포함되었다.  이후  하반기의  우수
          고지현씨(40, 김해시 진영읍)가 기획서 ‘문화탐                   사례지 탐방과 실제 기획안을 실현해 보는 실습                                                        김해일보
          정단’으로 문체부장관상을, 송윤경씨(47, 창원시                   과정, 기획서 멘토링 과정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                                  (http://www.gimhaeilbo.com)
          마산합포구)가  기획서  ‘니나네나  아트클럽’으                   을 종합하는 100시수로 진행됐다.
          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각각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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