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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네, 이소연. 내가 요즘 치매가 왔나 봐.”

              “야! 너는 할머니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 괜찮아요.”
              “아유, 할머니는 우리보다 기억력도 좋으시네!”



              오순미 씨 덕분이었다. 오순미 씨의 손녀 이름도 이소연이라기에 똑똑히 기억이 났
        다. 다시 상체를 일으켜 손바닥으로 앞 유리 창의 습기를 닦았다. 창밖은 눈발이 날리는
        것도 같았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춘분은 지나야 외투가 가벼워졌으니까. 습관처럼 햇
        빛 가리개에 붙어 있는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지는 건 괜찮은데

        입술색이 사라지니 사람이 여간 궁색해 보이는 게 아니다. 가방에서 뭘 좀 찾아서 발라
        볼까 했지만 ‘수영장에 가는 걸, 뭘.’ 하고 그만 뒀다. 주말이면 남들처럼 교회에 다니지
        도 않고 사교모임도 딱히 없어 외출할 일이 별로 없는 나는, 화장을 하거나 머리칼을 가
        꾸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 그래도 간혹, 남 교수의 제자가 결혼식에 우릴 초대할 때면

        동네 미용실에 가 머리숱을 메꾸고 재경이가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사 준 분홍색 루주
        를 바르고 나갔는데, 분홍색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오순미 씨 덕에 알게 됐다.


              “진짜 여태 한 번도 안 가 봤다고요?”

              “그러게요... 재혼하고 일산에 와서 산 게 벌써 20년이나 됐는데.”
              “세상에....”


              집 근처 인근 호수공원에서는 매년 봄이면 꽃 박람회가 열렸다. 오순미 씨는 용인에

        살다가 큰아들 내외를 분가시키고 4년 전에 일산으로 이사 온 뒤에는 해마다 꽃 박람회
        에 갔다는데, 나는 작년 5월에 오순미 씨와 간 게 처음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오순미
        씨를 보며 나는 그게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싶다가 어쩌면 내가 여태 꽃 박람회에 가 본
        적이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재혼을 했다는 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순미 씨의 화제는 금방 내 입술색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언니는 핑크색은 영 아닌데... 언니나 나 같은 쿨톤들은 핑크보단 버건디가 어울려
        요. 내꺼 한 번 발라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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