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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都)의 고려정부를 위협하려는 듯 북계에 머무르다가 행동을 개시하였다.
몽골군은 남진 과정에서 2개월간 광주 일장산성(日長山城: 남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부사 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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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李世華)가 지휘아래 사력을 다해 싸운 광주 주민들은 성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광주에서 패퇴
를 경험한 몽골군은 다시 남진하여 수주의 부곡인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곳의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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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원(白峴院: 진위현에 속한 역원) 의 승려로 이곳에 입보하여 있던 김윤후(金允侯)의 지휘하에 적
장 살리타이를 사살하니,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부장 데구[鐵哥]의 인솔하에 서둘러 철수하였다.
김윤후는 몽골의 제5차 침입시(1253년) 충주성에서 몽골군을 격퇴시켜 용맹을 다시 한번 과시하고
상장군으로 승차되었다. 23)
이후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죽주(竹州: 안성시)에서 방호별감 송문주(宋文冑)의 지휘하에
1236년 8월 하순부터 9월초까지 보름동안 몽골군과 싸워 성을 지켜 내기도 했으며, 1235년에는 지평
현(砥平縣)에서 야별초(夜別抄)와 지평현 사람들이 몽골군을 습격하여 다수를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
었고, 1256년에는 인주(仁州: 인천시) 경내의 소래산(蘇來山)에서 대부도(大部島: 안산시) 별초군이
기습하여 몽골군 100명을 물리치기도 했다. 24)
결국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성립됨으로써 기나긴 전쟁이 종식되었다. 그후 강화를 주
장하는 국왕과 강화에 반대하는 무인정권 사이의 힘겨루기 끝에 1270년(원종 11) 왕이 몽골군을 끌어
들여 무인정권을 무너뜨리고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이던 삼별초(三
別抄)가 반발하여 다시 항쟁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항쟁은 각지에서 일반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예를 들어 1271년 정월에 개경에서 관노(官奴)들이 몽골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의 삼별초에 가려는 모
의가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대부도 사람들이 섬에 들어온 몽골군을 죽이고 개경의 관노들과 행동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즉 착량(窄梁)을 지키던 몽골병이 대부도에 들어가 주민들을 약탈하였는데, 대
부도민들은 이를 원망하고 있다가 개경의 변보를 듣고는 주민들이 몽골병 5명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
켰던 것이다. 이때 정부에서는 수주부사 안열(安悅)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그는 진압의
공로로 5품관직으로 승진되었고, 항쟁의 주역인 홍택(洪澤)은 처형(處形)되었으며, 홍균비(洪均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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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매를 쳐서 역리(驛吏)로 삼았다. 또한 수주부사 안열이 대부도민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수주
26)
는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또한 삼별초가 봉기한 후 개경의 정부에서는 김방경(金方慶)을 역적
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반군 토벌에 나섰다. 삼별초군은 배중손(裵仲孫)의 지휘하에 강화도와 육
지 사이의 교통을 끊고 항쟁하면서 남양(南陽) 앞바다의 영흥도(永興島: 인천시)까지 이르렀다. 이에
역적추토사 김방경은 몽골군 송만호(宋萬戶) 등의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영흥도에
오산시사 이르렀다. 삼별초군은 이미 도망하고 곧바로 적중에서 도망하여 나온 남녀노유 약 1천여 명은 모두
제 2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광주목 名臣 李世華.
2 2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0, 진위현.
권
23) 『高麗史』 권103, 열전16 金允侯傳.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0년 12월.
24) 『高麗史』 권24, 고종 43년 4월 庚辰.
25) 『高麗史』 권27, 원종 12년 2월 辛丑.
100 26) 『高麗史』 권56, 志10 지리1 楊廣道 水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