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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쳐죽였다. 강화부에서도 거짓 항복하고 향응을 베푸는 척하다가 이때 비장 왕동첨(王同僉)이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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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숨어 있다가 이들을 죽이니 적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안성에서도 홍건적이
양광도 주군(州郡)에 항복을 권고하며 기세를 떨쳐 감히 예봉을 꺾지 못하였으나, 오직 안성현의 사
람들만 거짓 항복하는 체 하고 연회를 베풀어서 적군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다가 술에 취한 틈을 타
괴수 6인을 베어 죽였다. 이 때문에 홍건적은 감히 남하하지 못하였고, 이 공로로 안성현은 13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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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1)에 군으로 승격되면서 수원 임내(任內)의 4개의 부곡을 합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원은 안변·강화·안성지역에서 적병을 격퇴한 것과는 달리 양광도 중에서도 가장 먼저
적병에 항복하여 적의 기세를 높이게 되었으므로 군으로 강등되고 4개 부곡마저 잃게 되었다. 이 때
문에 수원은 왕실의 신임을 잃어 의심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362년(공민왕 11) 6월 왕의 어가
가 수원에 행차하여 궁궐을 경영하려고 할 때 감찰사의 상소로 이를 재고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감찰사는 수원이 지난번 홍건적에게 항복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하면서, 인심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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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지적하였다. 때문에 수원 군민들은 이러한 오명을 씻으려고 재신 김용(金鏞)에게 후한 뇌물을
바쳐 다시 부(府)로 회복·승격되면서 4개의 부곡을 다시 찾게 되었다. 39)
김용은 공민왕이 복주(福州)에서 돌아와 흥왕사 행궁에 머물 때, 최유와 함께 흥왕사(興王寺)의 난
을 일으켜 공민왕을 살해하려고 한 사람이다. 환관 안도치(安都赤)와 우정승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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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였지만, 노국공주의 기지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난이 평정된 후 1등 공신이 되었으나, 흥왕
사 변란의 주모 사실이 발각되어 경상도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계림부(鷄林府: 경주시)에
투옥된 뒤 마침내 참형 당하였다. 41)
한편, 수원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고려사』 기사를 토대로 보면, 왜구는 1350년(충정왕 2)부터 창궐하기 시작하여 1391년(공양왕 3)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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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무려 472회, 침입지역도 226개 지역에 이른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간에 무려 378회나 되었
다. 우왕 3년이 가장 극심하였는데, 무려 1년에 54회나 되었다. 매월 평균 4~5회나 이를 정도로 그
피해상은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왜구의 규모는 많은 때는 400여 척이라 하고 적은 때는 20척에
이를 정도였다. 배 한 척에 20~40명이 탈 수 있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약탈 규모가 많을
때는 쌀 4만여 석에 이르기도 했다. 그중 경기지역의 왜구 침탈 사례는 모두 27개 지역, 65회로 경남
(97회)과 충남(78회) 지역에 이어 3번째로 많다.
당시 왜구가 침입한 목적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이들이 약탈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대상은
미곡(米穀)이었다. 따라서 주된 공격의 대상은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선과 세곡을 저장한 창고
오산시사
36) 『高麗史』 권39, 공민왕 10년 12월 丁未.
제 37) 『高麗史』 권56, 志10 지리1 楊廣道 水州 安城縣 ; 『高麗史節要』 권27, 공민왕 11년 4월.
2 38) 『高麗史』 권40, 공민왕 11년 6월 丙子.
권
39) 『高麗史』 권56, 志10 지리1 楊廣道 水州 ; 『高麗史節要』 권27, 공민왕 11년 4월.
40) 『高麗史』 권40, 공민왕 12년 윤3월 辛未.
41) 『高麗史』 권40, 공민왕 12년 윤3월 癸巳 및 동 4월 己未.
102 42) 나종우, 「홍건적과 왜구」 『한국사』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