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제2권_Neat
P. 101
27)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사로잡아 갔다. 이로써 수원지역 주민들은 삼별초 토벌과정에서 자못 101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역사
한편, 수주는 홍건적과 특별한 악연이 맺어진 곳이다. 홍건적의 제1차 침입은 1359년(공민왕 8) 12 / 유적
월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에 앞서 11월에는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일삼다가 돌아갔
28)
다. 이후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12월에 모거경(毛居敬)이 약 4만여 명의 무리를 이 · 유물
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이들은 계속 남하하여 마침내 서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고려는
이승경(李承慶)을 등용하여 군사를 독려하면서 홍건적에 대처하도록 하였으나, 적군은 다음해 정월
에는 서경을 집중 공략하고, 2월에는 안우(安祐)가 상장군 이방실(李方實)과 함께 함종(咸從)에서 적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기세가 꺾인 적군은 도망하기에 바빴고, 계속되는 고려군의 추격으로 거의 궤
멸되어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자는 겨우 3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이들 홍건적은 수군(水軍)
29)
으로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면서 고려를 괴롭혔다.
30)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있었다. 당시 홍건적은 위평장·반성·사유·
관선생 등에 인솔되어 약 10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계속 남하하여 개경으로 육박하였다. 이때 공민
왕은 복주(福州: 안동시)로 파천 길에 올랐다. 적군은 개경을 함락한 후 계속 남하하여 수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우마를 죽여 가죽을 펴서 성을 삼고, 물을 뿌려 얼음을 만들어 사람이 붙잡고 오르지 못
하게 하였다. 또 남녀를 잡아 불에 구어 먹는 등 잔인하고 포악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31)
32)
파천 길의 공민왕은 이해 1월 복주에 도착하여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최영 등의 장수
33)
로 하여금 20여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건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정세운·안우 등은 다음해 정
월 적을 대파하여 개경을 회복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에 사기를 잃은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 상만호로 있던 이성계는 친병 2천여 명
을 이끌고, 선봉에서 적의 괴수 사유·관선생을 목베는 큰 전공을 세웠다. 34)
그러나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홍건적이 선봉을 보내 양광도 주와 군에 모두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
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항복하여 적의 형세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강등되어 군(郡)으로
되었다. 이때 수원 임내의 양양(陽良)·미탄(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의 4개의 부곡(部曲)이 안
성군으로 편입되었다. 35)
이러한 사실은 안변부나 강화부 및 안성군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안변부는 홍건적의 침입을 당
하였을 때 읍인(邑人)들이 거짓 항복하여 적 29명에게 향응을 베풀고, 술이 세 순배 돌 때 모두 두들
27) 『高麗史節要』 권18, 원종 11년 6월.
28) 『高麗史』 권39, 공민왕 8년 11월 戊午.
29) 『高麗史』 권39, 공민왕 8년 12월 및 동 9년 1월, 2월.
30) 『高麗史』 권39, 공민왕 10년 10월 丁酉.
31) 『高麗史』 권39, 공민왕 10년 11월 辛未.
32) 『高麗史』 권39, 공민왕 10년 12월 壬辰.
33) 『高麗史』 권40, 공민왕 11년 정월 戊申·甲子·乙丑.
34) 『高麗史』 권39, 공민왕 11년 정월 甲子.
35)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楊廣道 水州 및 安城縣 ; 『高麗史節要』 권39, 공민왕 11년 4월조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水原都護府 건치연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