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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1)에서 육조의 직무를 분할하는 것과 동시에 육조의 각 조마다 3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 117
치하였다. 즉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관아들을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 역사
에 분속시켜 각각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비하였다. 태 / 유적
종이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육조에 업무 관장의 비중을 높여 주었음에도 실제적으로 의정부의
서무(庶務)가 육조로 돌려진 것은 1408년이었다. 의정부의 정승은 국왕을 보필하고 협조하는 직책으 · 유물
로서 왕의 정책을 견제하거나 관료들을 통솔하는 지위로 보지 않았다. 조선 왕조에서 관료제 정비의
주요 모델로 삼은 사례는 송나라였다. 육조가 업무에 대한 보고와 협조를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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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였다.
결국, 1414년에는 육조 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에서 국정의 서무를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의정
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 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행정적인
구조로 본다면 육조에서 직사(職事)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게 하고 왕지(王旨)를 받들어 시행
하게 한 것이다. 육조가 위상이 높아지고 국왕과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의정부의 기능은 물론 규모도
축소되었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태종의 관료제 개편을 지지하던 하륜에게 맡겼다. 의정부는
권력이 없는 기구로 축소되고 육조가 행정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나 육조 전체 행정을 총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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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가 없어져서 업무가 지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태종의 강력한 정국 주도 리더십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왕조의 반석이 되는 관료제의 정
비 이후 국정을 하나로 지휘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점은 육조직계제 시행 이
후 국왕이 병조를 통해 비상령을 내려 궁궐에 문무백관과 군사들을 집합시키는 취각령(吹角令)이 마
련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태종이 비상 시국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면 경복궁에서 취각하여 당직
하는 총제(摠制)·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내금위(內禁衛)·내시위(內侍衛)·
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응양위(鷹揚衛)·도성위(都城衛)·각령
방패(各領防牌) 등이 병기와 갑주(甲胄)를 갖추어 각 문을 지키고, 시위군대가 각자의 장소에 집합하
면 의정부·육조·종친·훈구(勳舊)·시직(時職)·산직(散職) 2품 이상이 반당(伴儻)을 거느리고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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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갖추어 각각 궁궐 외부에서 대기하도록 하는 명령이었다. 국왕의 관료 통제가 각 부서별로 일
원화되고 고위 관료조차 왕권을 견제하기는커녕 휘하에서 관료의 일원으로만 움직이게 하는 제도였
다. 이를 통해 태종은 안정된 중앙의 정치 형국을 창출할 수 있었으며 지방 통제의 단계로 나아갔다.
오산지역까지 국왕의 관료를 파견하는 수령 제도의 정착이었다.
조선왕조 초기의 지방 제도 개편에서 무엇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은 왕도(王都)의 건설이었
다. 조선왕조 국가의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되면서 경기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개편되었다.
1394년(태조 3)에 한양 중심의 새로운 경기도 지방 체제가 구축되었다. 왕조 국가 초기에는 왕실과
조정이 개경에 있었으므로 개성부(開城府)가 경기도의 토지·호구·농상(農桑)·학교·사송(詞訟)
26) 『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1월 3일(임자).
27)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4월 17일(경신).
28) 『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8월 5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