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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集村) 등 민호의 분포 상태나 촌락의 지형, 전결의 다소, 촌락의 발달 정도 등을 참작하여 면리를 119
편성하였다. 면리제에 대한 논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러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원리에 의 역사
거하여 법제화되었다. 오가작통에서 경외(京外)는 5호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며, 지방은 5 / 유적
통을 1리로 하여 이정(里正)을 두었고, 각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면리임은
전함품관층(前銜品官層) 같은 유력층이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세종 때의 『경상도지리지』와 · 유물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면리제의 실태는 읍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4개 면이 편제되는 방위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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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 오산지역의 읍면 단위 행정체제는 조선 초기 군현제(郡縣制) 정착과 면리
제 실시로 행정적 구조가 구축되었다.
태종대 지방 제도의 정비는 행정구역의 조정과 수령의 파견이 대표적이다. 행정구역의 정비는 태
종의 재위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13년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
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하였다. 또한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군
(郡)·현(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 및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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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사례였다. 1416년에는 함흥부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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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면서 영길도를 함길도로 개명하였다.
태종대 지방 통치의 특징은 국왕이 선발한 관원을 직접 전국적으로 파견한 점이며, 그 첨병에 서
있던 관원이 수령이다. 사실 태종 집권 초기에도 왕조 정부의 지방 통치는 전 왕조의 영향에서 벗어
나지 못한 상태였다. 태종의 집권을 전후한 중앙의 변란은 지방 통치 구조 개편에까지 신경 쓸 여력
을 주지 못했다. 태종의 집권은 본격적인 왕조 체제의 정비와 통치 구조의 토대 구축이라는 것을 대
외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태종 재위 초기의 지방은 고려시대의 지방관인 안렴사(按廉使)가 정사를 통할하고 상벌의 권세를
잡고 있었다. 태조대 잠시 폐지되어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변경되었으나 태종 초기에 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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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관찰출척사를 안렴사로 개명하였다. 그런데 안렴사가 도내의 수령과 장수들에게 비해 지위가 낮
은 경우가 있어서 국왕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개편하기 위해 파견한
관원이 관찰사였다. 관찰사는 태조 초기부터 파견하였지만, 그 권한이 안렴사와 절제사 등에 분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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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원화된 행정적 통치를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태종의 지방 통치 구조 재편의 첫 단계는
안렴사를 폐지하고 관찰사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해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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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교대해 보내도록 하였다. 기존에 지방관의 파견이 임시적이거나 시세를 대응하기 위해 진행한
것이었다면, 태종의 관찰사 파견은 지방관 제도를 법제화시키는 조치였다.
태종은 각도 관찰사의 파견에 이어서 관찰사의 권한 중에 하나였던 임시로 수령을 임명하던 법을
3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면리조 참조.
33) 『태종실록』 권26, 태종 13년 10월 15일(신유).
34) 『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9월 9일(정유).
35) 『태종실록』 권1, 태종 1년 1월 24일(갑신).
36)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9월 24일(임인).
37) 『태종실록』 권2, 태종 1년 11월 7일(신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