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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흉년에 백성들이 기근(飢饉) 속에 허덕이면서도 조세를 부담하게 한다면 과                                          125
                  중한 부담이 될 것이었다. 또한 풍년에는 곡식의 수확이 많아도 조세가 너무 가벼워 중용을 잃는 결                                          역사

                  과를 야기할 수 있었다. 경상·전라도와 같은 연해 지대의 논에는 1~2두의 볍씨를 뿌리면 그 소출이                                          /  유적
                  10석(石)에 달하여, 1결의 소출이 많으면 50~60석을 넘었으며 적어도 20~30석을 내려가지 않았다.

                  밭의 경우에도 남도는 비옥하여 소출이 매우 많은 데 반하여 경기도와 강원도와 같은 산을 의지해 이                                          · 유물
                                                                                       72)
                  루어진 고을들은 비록 1~2석의 볍씨를 뿌린다 해도 소출이 5~6석에 불과하였다.
                    세종은 지역 여론을 수용하여 1443년(세종 25) 10월에 당대의 중신인 황희(黃喜)·신개(申槪)·하
                  연(河演)·황보인(皇甫仁)·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를 불러 조선 전기의 조세법인 공법(貢法)의

                  편의 여부를 의논하게 했다. 그 주요 내용은 각도의 전지(田地)를 1~2년 동안에 측량하기 쉽지 않으
                  니 오산 지역 인근을 양전(量田)하고, 수확량을 결정하는 도량형인 결(結)·복(卜)·속(束)·파(把)를

                  경(頃)·묘(畝)·보(步)의 법으로 고쳐 만들어 9등으로 조(租)를 거두게 하는 것이었다. 농사의 풍흉
                                                                    73)
                  에 따라 해를 9등으로 나누는 연분(年分) 9등법의 논의였다.
                    세종은 오산지역을 비롯한 경기도의 여론과 중앙 관료들의 논의에 따라 결부제(結負制)에 의거하
                  여 전지를 비옥하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농사 작황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차

                  등 있게 전세를 거두게 하였다. 이러한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은 군현 단위로 농사의 작황을 상상
                  (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중상(中上)·중중(中中)·중하(中下)·하상(下上)·하중(下中)·하

                  하년(下下年)의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예컨대 대풍작일 때를 상상년으로 하여 1결
                  (結)에서 20말[斗]을 징수하는 것으로 정하되, 한 등급씩 내려올 때마다 2말씩 줄여 하하년에는 4말

                  을 거두는 형식이었다. 또한 수확량이 40말 이하일 경우에는 전세를 면제해 주었다. 1결의 수확량을
                                                                                    74)
                  400말로 보아 그 1/20에 해당하는 20말을 1결의 최고 세액으로 정한 규정이다.  흉년에는 하중을 하
                                                75)
                  하로 판결하여 조세를 면제시켰다.  당시 1결이란 볍씨 1말을 경작하여 소출되는 토지의 대략적인
                  범위를 말한다.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정확한 수치와 도량형을 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라고 평가할 부분이다. 세종은 해당 지역의 수령이 연분을 심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
                  찰사가 이를 왕에게 보고하면,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회의를 거쳐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연분을 결

                  정하도록 했다. 지방의 보고에서 연분의 등급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판단될 경우이거나 혹은 재상(災
                  傷)이 발생했으면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재심사한 이후에 조세를 수취하도록 하였다.                            76)

                    그런데 경차관 등의 관원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오산지역의 조세를 정하고 재해를 조사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경차관으로 파견되는 인원이 지역 토지를 모두 조사할 정도로 충분하

                  지 않았다. 한 고을의 전지가 적어도 수천여 결을 내려가지 않았고, 많으면 만여 결이나 되었으며, 경
                  차관의 입장에서 춘분(春分) 전에 되도록 빨리 끝마치려 하여 전지마다 일일이 직접 살피지 않고 대




                  72) 『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8월 10일(무인).
                  73) 『세종실록』 권102, 세종 25년 10월 27일(무신).
                  74) 『세종실록』 권106, 세종 26년 11월 13일(무자).
                  75) 『성종실록』 권23, 성종 3년 10월 17일(경진).
                  76) 『세종실록』 권112, 세종 28년 6월 18일(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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