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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되어 있었고, 평택지역과 오산지역에도 그와 연계된 지역 거점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오산-아산 일원의 유적들은 Ⅰ~Ⅲ기의 시기구분이 가능하다.(표 1, 그림 12)
궐동유적을 통해 파악되는 기원후 2세기경의 오산지역 문화가 어떻게 변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나마 그 이후 시기에 해당하는 인근의 유적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 13. 청학동유적 3~4세기 심발형토기의 변화상(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3)
16)
궐동유적 남측 구릉에 위치한 청학동유적 (그림 3-4)의 8지점(누읍동) 분묘 28기도 관·곽토광묘
와 주구토광묘가 혼재하는 유적이나 유물의 조합상을 보면 궐동유적보다 한두 단계 늦은 시기에 해
당한다, 그러한 점은 그림 13의 심발형토기의 양상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발굴보고자는 이 토기
및 원저단경호를 기준으로 유적의 시기를 2기(1기는 3세기 초~3세기 중엽, 2기는 3세기 중엽~4세
기 중엽 정도)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의 구분은 이 지역의 역사문화가 기원후 3세기까지 원삼국시대, 4세기 이후는 삼국시
대라는 일반적인 시대구분법에 따라 시간의 추이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말해준다. 이 시기의 많은 연
구가 ‘3~5세기 마한 백제 ○○○의 연구’ 등으로 제목이 정해지고 있는 것은 현재의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며 오산지역의 이 시기 문화도 그러한 틀에서 이해되고 있다. 17)
그리고 오산지역의 원삼국시대 말기에서 5세기까지의 문화적 발전과정이 보다 집중적으로 파악되
18)
는 유적은 궐동유적의 북측에 위치한 수청동고분군(그림 14) 이다.
303기의 분묘가 밀집분포한 이 유적에서 오산 2~3세기 문화의 변천양상이 제대로 확인되지는 않
오산시사
으나 4지점 3호묘(그림 14)의 자료를 보면 토기의 변화와 철기의 발전양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이해된
다. 이를 볼 때 오산지역은 3세기 후반경 사회집단의 급속한 발전이 있었던 것 같으며 그들이 수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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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러한 근거에서 그 일대를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目支國)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16) 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3 『오산 청학동 유적』, 학술조사보고 제25책 .
17) 최지훈, 2019 「원삼국~한성백제기 오산천유역문화의 지역성」,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70 18) 京畿文化財硏究院, 2012 『烏山 水淸洞 百濟 古墳群』, 學術調査報告 第139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