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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주구묘와 비주구묘를 조영해가면서 4~5세기에 오산 일원에서 최대의 거점세력을 장기간 유 71
지해 나아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 유적 · 유물 역사
그림 14. 수청동고분군 4지점 유적분포와 3호묘(京畿文化財硏究院 2012)
그 밖에 내삼미동에서 이 시대의 측구부탄요가 발굴되어 당시에 이미 이 지역에서 숯을 생산하고
그것을 원료로 하여 어떠한 수공업적 생산활동을 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러한 탄요는 인근
의 화성 기안리유적이나 평택 가곡리유적과 같은 비슷한 시기의 제철유적이 오산지역에도 존재하였
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크게 아쉬운 점은, 오산지역에서 이처럼 분묘유적을 통해 원삼국시대 2~3세기의 문화적 추이
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동일시기의 취락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아 당시 실생활
19)
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차후 이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와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19) 오산 일원에 이 시대 주거지들이 일부 있기는 하나 대부분 잔존상태가 열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