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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전답 둔전 36결45부5속과 인근에 진위둔(振威屯) 1백13석18두락(斗落)의 전답 둔전이 있었다. 당
시에 오산지역에 둔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토질이 좋아 소출이 많았고 삼남지방을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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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농사짓기와 수조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성 밖에서 생
산업
활한 가구를 농가로 보고 계산했을 때 1농가당 전답 면적이 약 3정보(약 1결)로 현재 우리나라의 농가
당 경지면적 1.4정보와 비교하면 2~3배의 면적이 되지만 당시에는 생산성이 낮아 1결당 6백 말을 생 · 경제
산하면 소작인에게 1백 말 정도가 돌아 왔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오산 농민들의 생활상을 짐작 / 보건
할 수 있다. 실제로 고종 26년에 수원 지방에서 제1차 민란이 일어난데 이어, 고종 28년에 제2차 민 · 환경위생
란이 또 발생할 정도로 농민들이 살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의 농정시책으로는 단순히
저수지를 만들고 농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만들어 양곡을 봄에 대여해주고 가을
에 환곡(還穀)하도록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 사회복지
한편 그 시절 오산을 비롯한 수원 인근지방의 주요 물산(物産)으로는 소금, 황조기, 농어, 진어, 뱅
어, 황합, 굴, 낙지 등 수산물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해지역(서신, 사강 등)과 인접해 있어 교류가 / 사법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내륙지방의 농산물과 해안지역의 어물 교류를 위한 시장으로 장이 열 · 치안
렸는데 그중 오산시장은 역사가 매우 길다. 1753년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오산장이 처음 나오며,
1863년(철종14년)에 발간된 『대동지』와 1899년(광무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 소방
수원에서 남으로 40리 지점에 있는 청호면(현재 오산)에서 3일과 8일에 장이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 언론
고 하니 오산장의 역사는 무려 2백 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예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장이
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 한말에 선진 강국들의 개방 압력으로 쇄국정치에서 벗어나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는
데, 일본과의 통상개시로 선박업과 금융업이 일본의 주도권 아래로 들어갔고 곡류 수출이라는 미명
아래 쌀과 같은 주식원료의 무리한 일본으로의 반출은 우리의 부족한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켜 국
민 기아를 초래하게 되었다. 고종 26년(1889)에 금곡령이 내려졌으나 사전에 아무런 조치 없이 행하
여 결국 엄청난 위약금만 변상하고 마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료들의 부패와 내전은 더욱 심해져 갔
고, 동학란과 같은 민간봉기가 발생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불러들였고 일본군도 인천을 통
해 상륙하면서 우리나라는 외국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개화사상과 선진 농업기술이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의 유학이 빈번해지고 각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외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농학 및 농업기술 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81년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안종수
는 근대적 농업기술서인 『농정신편(農政新編)』을 발간하였고, 그 후 1884년에 『잠상촬요(蚕桑撮要)』 16)
가 발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경석이 미국에서 종자와 가축을 가져와 키우고 농작업 기구를 구
입하는 등 근대적 농법도입을 시도하였다. 그가 작성한 목록을 보면 작물류 3백44종, 가축류 64마리
를 수집해서 재배하거나 사육하여 1884년에 대풍을 이루었고 거기서 거둬들인 생산물이 종자가 되어
16) 근대사 문헌으로 1884년 김사철이 누에치기와 뽕나무 기르는 법에 관하여 저술한 농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