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제5권_Neat
P. 34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영농을 권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책을 행하였다. 그 예로 친경(親耕)
                  의 예(禮)와 선농제(先農祭)와 선잠제(先蚕祭)가 있다. 선농제는 신라시대부터 1908년 순종 때까지

                  지속되어온 가장 성대하고 유구한 나라의 제사(祭祀)로 왕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적전(籍田: 지금
                  의 시험장과 같음)에 나가 제사를 지내고 임금이 몸소 1백 이랑을 일구는 친경을 하고 일이 끝나면 제

                                                        14)
                  사를 지낸 소를 큰 솥에 끓인 노주례(勞酒禮) 를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선농탕(先農湯)으로 오늘날
                  의 설렁탕이 되었다. 선잠제는 정종 2년에 시작하여 숙종까지 계속되었다. 친경제는 왕들이, 그리고

                  친잠제는 왕비가 행하였다.
                    지방의 권농조직으로는 권농관(勧農官)과 잠실(蚕室)이 있었다. 주로 뽕나무를 심고 장부를 만들어

                  관리하고 뽕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으며, 권농관은 면에 한 사람씩 두어 농토가 묵혀지지 않도
                  록 주민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반을 넘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연산군의 폭정 이래 약 200여 년간 외적의 침
                  공, 내란, 흉작, 당쟁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후기의 농가경제는 양도(糧道)조차도

                  부족한 영세농으로 충만되어 있어 그 생계를 자작농토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계수
                  단으로 소득의 증가를 위해 농법의 개량에 힘쓰고 시장성을 띤 고가의 농산물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는 농업의 부흥을 위해 여러 가지 권농정책을 폈다. 권농관에게는 농우를 대
                  여해주는 업무를 맡도록 했으며 농구와 수차를 제작해 주도록 하여 영농을 도와주는 역할을 부여하

                  기도 했다. 농서도 발간하는 등의 노력으로 다소 회복하는 듯했으나, 순조에 이르러 한해가 잦고 정
                  치가 문란하게 되기 시작하더니 철종 때에는 삼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해지며 다시 민생이 도탄에 빠

                  지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열강들은 앞다투어 이 땅에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1876년에 우리나라
                  는 최초로 일본과 한일수교조약(韓日修交条約)을 체결하였다. 1879년과 1880년에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고, 1885년에 내무부가 설치되었으며, 그 안에 농무사(農務司)가 만들어져 농정사무를 근대
                  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 31년(1894)에 개화당(開化党)이 집권하여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등 국

                  가 전체의 문물제도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갑오경장으로 의정부(議政府) 관제를 비롯한
                  208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1894년 3월에 내정개혁에 관한 법률안이 작성되고 농무국에서

                  농업, 수산, 목축, 잠업 등 농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이 당시 1883년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도시를 순방하고 박람회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귀국하였다. 미국의 도움으로 시험장을 만들었으며 1884년에 벼를 베는 기계, 터는 기계, 재식
                  기, 쇠스랑 등을 들여오는 한편, 각종 채소와 과수를 심고 1885년에는 가축도 도입하여 사육하였다.

                  그리고 1876년에는 동래무예학교가 설립되고 1883년 원산학사를 설립하여 농업, 양잠 등 여러 과목
                  을 교육함으로써 근대적인 농업교육이 시작되었다.
      오산시사




      제

      5
      권

                  14)   집사관(執事官)과 농민(農民) 등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풀던 잔치.
     32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