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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습을 김제로 보내어 수백 년 전에 수축되어 부실화된 벽골제를 중수케 하였고, 세종 11년(1429)에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수차제도를 따르면 좋을 것을 건의하였다. 그 후 연산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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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1496)에는 심한 가뭄이 들자 수차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연산군 때에는 수리시설의
산업
사물화(私物化)가 성행하면서 시설관리가 빠르게 쇠퇴해갔다.
그 후 제언의 신축과 수축에 힘입어 영조 5년(1729) 당시 전국의 제언 수는 3천5백27개에 달하였 · 경제
다. 당시 수원 지방에도 만석거, 만년제, 축만제 등 22개의 제언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제언은 국정 / 보건
의 큰 부담이 되었고, 1800년대의 빈번한 한수재가 발생하여 국력의 쇠퇴와 더불어 수리공역(水利功 · 환경위생
役)의 유지에도 큰 부담이 되었다.
2) 권농정책 · 사회복지
조선은 유교(儒教)를 국가통치 및 백성교화의 근본 지주로 삼았으며 유교의 경전이나 임금의 교시 / 사법
(教示)에서는 백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 치안
10)
농업을 대단히 중하게 여기어 왔는데, 세종 26년에 반포한 권농교문(勧農教文) 이 권농이념을 잘 나
타내고 있다. 이 교문의 첫머리에 “나라는 국민으로서 근본을 삼으며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 · 소방
으며 농사를 하는 사람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의 원천이고 왕이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두어 · 언론
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이나 공업은 억제하였는데, 이를
잘 대변하는 것으로 성종 3년 7월의 교시에서 “재산을 만드는 것은 농사를 열심히 하는데 있고, 재물
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절용(節用)에 있으며, 절용에는 반드시 검약(倹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렇
듯 조선시대의 권농정책은 숭농사상을 고취시켜 생산성을 높이고 농사기술을 보급하는데 역점을 두
었다. 그리고 농서의 보급과 제언수축 및 농기구개량, 종자와 농우(農牛)대여 등의 시책을 추진하였
다.
먼저 농서의 편찬과 보급을 살펴보면 조선왕조는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지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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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勧農官)과 농업경영자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중국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 ,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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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찬요(四時纂要)』 등의 수집보급을 통해 중국의 선진농법을 우리 것으로 흡수하는 정책과, 다른 하
나는 우리나라의 선진지역 관행기술을 채록하여 농서로 편찬하여 보급하는 정책을 폈는데 세종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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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발간한 『농사직설(農事直説)』 , 세조에 이르러 편찬한 『금양잡록(衿陽雑録)』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농사에 관한 기술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농사직설(1429)』 편찬 이후 점차 우리 실정에
맞는 우리 농서를 보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는데, 하삼도 선진지역의 관행농법을 수집하여 새 농
서로 편찬하여 함길도, 평안도 등의 한전농업지대에 확산시켰다.
10) 세종대왕이 즉위 26년 되던 해인 1444년 농업의 소중함을 담아 관리들에게 내린 교지.
11) 중국 원(元)나라 때 대사농(大司農)에서 편찬한 농서.
12) 중국 당나라 때 한악이 편찬한 농업관련 저서.
13) 조선 초기에 편찬된 농사 지침서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 지침서이다. 1429년(세종 11년)에 세종의 명을 받고 각도 관찰사가 경험
많은 농부에게서 들은 내용과 중국 농법을 종합해 정초와 변효문이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