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오산문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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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29일에 대대적으로 오산장 중 우시장 이러니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고착화된 상황을
에서 이루어졌다. 맞이하게 되며, 지금까지도 남북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1917년 당시 성호면 오산장은 연간 거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에서 유엔이 인정하는 합법
래액수가 17만 4,000원이었고, 수원성 적인 정부가 수립되며 대한민국이 탄생한다.
내장, 수원성외장은 평균 16만 5,000원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공산주의로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이었다. 오산장은 남양장, 발안장, 반월 명분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무력 기습 전면전을 일으킨다. 남한
장, 사강장 및 수원성 내외장을 모두 의 대한민국 정부는 변변한 대비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6·25
포함하여 가장 거래규모가 큰 장이었 한국전쟁으로 빨려 들어간다. 유엔은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
으나,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이 군을 구성한다. 1950년 7월 5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 스미
후에는 점차 쇄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스전투부대 540명이 오산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최초로 교
오산장은 100년 전통으로 홍보하는 오 전한다. 이 전투로 인해 150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실종되는 피
산오색시장과 문헌상 최소 260년이 넘 해를 보게 된다. 이날 갈곶동에서는 한국군이 인민군과 교전
는 전통의 오산(오매)장터로 구성되어 하는데, 두 교전에서 병력과 화력이 부족한 미군과 한국군은
있으며, 특히 오산오색시장은 고객이 퇴각하고 만다. 비록 전투에서는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나, 일방
밀려다닐 정도로 마켓 기능을 넘어 관 적으로 전세가 밀리던 상황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해 이후 낙동
광형 형태의 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였 강 전투를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큰 성과를 낸 전투가 되었다.
다. 경기 남부의 가장 큰 시장이 되었 우리는 이 오산죽미령전투와 오산갈곶동전투를 합하여 오산
다. 오산장터는 현재 재정비에 들어가 전투라 한다. 오산죽미령에 오산초전기념비와 기념관이 세워져
새롭게 전통과 젊음과 예술이 공존하 있으며, 이 주변에 평화공원이 세워질 예정이다.
는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60년 3월 13일 오산고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은 제4대 정·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게 통령 부정선거 음모를 규탄하며 오산장터에서 시위운동을 일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 으켰다. 오산 4·19혁명으로 오산읍에서는 읍의원 선거가 행해
되며, 동시에 우리 민족도 식민지 지배 졌다. 이 의회는 5·16군사정변으로 6개월 만에 해산되었다.
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광복은 우 1968년 12월 경부고속도로가 오산까지 우선 준공되었고, 1969
리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어서, 남쪽 년에는 오산에서 천안까지 개통되었다. 1970년 6월 화성군 청
에는 자본주의인 미국이, 북쪽에는 공 사가 수원에서 오산으로 이전하여 화성군의 중심지로서 오산
산주의인 러시아연방인 소련이 진주하 읍시대가 열렸다. 이 화성군청사는 오산읍이 오산시로 승격되
여 남북이 분단되는 계기가 된다. 패망 고,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며 화성시청사가 남양으로 이전
한 일본이 아니고, 한국이 분단되는 아 하며, 매각되어 현재는 오산롯데마트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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