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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비는 능사(陵寺)로 창건된 사찰이다. 535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자료(2010)에 따르면, 전통사찰 지정 연도는 1967년이다. 그리고 2010년 문화
당시 사역도를 보면, 사찰에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대웅전, 요사 2채, 3층석탑, 약사 · 예술
여래불, 공덕비, 범종 등이 있었다. 당시 템플스테이 운영 프로그램이나 별도의 문화재구역 입장료는
보이지 않는다. 40) · 체육
보적사라는 명칭은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사찰’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나한도량 설화 / 교육
와 관련이 있다. 이 설화는 옛날 삶이 궁핍한 노부부가 쌀 두되만 남게 되자 구차하게 굶어 죽느니 부 / 종교
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먹고 공양한 후 집에 돌아오니 비어있던 곡간에 쌀[寶]이 가득 차 있었고[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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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나한(羅漢) 의 신통력이라 여겨 더욱 치성을 올리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보적사가 나
한 기도처로 유명하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42)
보적사의 역사를 보면, 창건 시점은 백제 아신왕 10년(401)이고, 창건 목적은 국리민복과 전승(戰
勝)의 기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정조대(1776-18900)에 약사전을 재건했고, 요사 3채를 조영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는 승려 주대식이 약사전을 허물고 대웅전을 건립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1986년에는 승려 도광(道光)이 주지로 보임했고, 1987년에 대웅전을 중건해 세마사(洗馬寺)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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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했다. 1990년 9월에는 삼층석탑(석가세존진신사리탑)을 조성했다. 또한 1996년 1월에는 1987
년 8월에 절 이름을 세마사에서 보적사로 환원했다. 44)
보적사의 역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적사의 규모이다. <보적사 표지판>에
보적사가 21칸 규모였다는 내용(1831년 『화성지』),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는 내용 등이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보적사의 규모가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12년 자료인 『경기도
요람』에 수원 지역 9개 사찰 가운데 보적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데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12년 당시
수원 지역의 9개 사찰은 용주사, 봉녕사, 만의사, 청련암, 신복사, 보적사, 약사사, 수도사, 홍범사
39)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에 사일(獅馹)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
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사도세자(思悼世子)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
(陵寺)로 145칸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갈양사는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사찰이다. 용주사는 창건과 함께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주사 항목.).
40)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한국의 전통사찰Ⅰ ,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2010, 456-457쪽. 이 자료에서 5층석탑은 3층석탑의 오
기, 석조미륵불은 약사여래불의 오기로 보인다.
41) 나한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인 ‘아라한’의 준말이다. 공양 받아 마땅하다는 응공(應供), 진리에 따른다는 응진(應眞),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무학(無學)으로 부르며, 수행으로 일체 번뇌를 끊고 수행자 최고 계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이다. 경전에 따
라 집합 단위는 다르다. 유마경 은 10대제자,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 은 16나한, 증일아함경 과 오분율 등은 500나한을
말하는데, 각각은 경과 율을 결집한 ‘1차결집’의 인물들이다(암송 : 경-아난존자, 율-우바리존자). 또한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과 <
수기품> 등에서 광명여래(가섭), 명상여래(수보리), 전단향여래(목건련), 화광여래(사리불), 법명여래(부루나), 보명여래(교진여 비구와
500아라한) 등은 석가모니불에게 장차 부처로 수기(授記)를 받은 성자로, 미륵하생 때까지 이 땅에 머물며 불법을 전하고 자비를 베푸
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오백나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현대불교신문 , 2016. 02. 19.).
42) 오산시, 오산시사 (하) , 1998, 130-131쪽 / 오산문화원(http://oscc.or.kr/heritage/1084, 2019. 8. 26)
43)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앞의 책, 2010, 456-457쪽. 보적사 ‘세마사사적비’에는 “1940년에 주대식 스님에 의한 일부 건물이 중수되어
왔으나 50년의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고 … 1986년에 부임한 도광스님이 길을 닦고 건물 전부를 다시 증축하였으며 절이름도 세마사
로 개칭하였으니 기필코 기도처의 옛 명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44) 「洗馬臺 龍珠寺」, 동아일보 , 1988. 06. 17.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