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7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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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과 최충
오산문헌서원의 영정각(影幀閣)은 고려시대 대표적 학자이며, 해동공자라 일컬어지
던 문헌공 최충(崔冲, 986~1068)의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콘크리트 구
조에 청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건물로 1991년에 오산 내삼미동에 건립되었다. 선
생은 중앙에, 우측에는 선생의 큰아들 문화공 최유선(崔惟善?~1075), 좌측에 선생
의 둘째 아들 문장공 최유길(崔惟吉)을 봉안하고 있다.
최충선생의 사당 영정각
영정각이 오산에 있게 된 배경은 황해도 해주에 있던 최충의 문헌서원을 남북이
분단됨으로서 후손들이 왕래할 수 없게 되자. 후손의 연고지에 오산문헌서원(烏山
文憲書院)을 짓게 된다. 오산문헌서원은 영정각과 강당을 겸한 2층의 건물로 구성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오산세교신도시 개발에 밀려 영정각만 남게 된 것이다.
해주최씨의 총본산이던 황해도 해주의 문헌서원은 고려 명종7년(1550) 주세붕
(1495~1554)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최충의 구재학당을 모방하여 서원을
설치하고, 선조의 윤허를 받아 사액서원이 된 곳이다. 서원이라 함은 예로부터 학문
을 크게 일으킨 대학자나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다 돌아간 분들의 영정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한편, 선비들이나 서생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율곡 이이(1536~1584)도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해주문헌서원의 원장이 되어 학
규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현종14년(1673)에는 관찰사 윤곡이 조정에 청원하여 산에
서 재목을 베어다가 중수를 하기도 하였다. 철종13년(1862)에는 이유원(1814 ~
1888)에게 비문을 받아 사원 뜰에 세울 묘정비를 건립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고종8년(1871)에 훼철되었다. 그 이후 서원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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